Korea 1946-1947, Photos by Cecil B. White (2)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에 진주한 美軍政 당시, 일본의 군수품 및 자산처리 담당 부서에서
복무한 Cecil B. White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그는 美 97보병사단에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1940년대 후반, 국내의 정치는 사상과 이념의 대립으로 혼란의 시기였으나
모든 것이 질곡스러웠던 그 시절이었어도 山河의 모습과 日常은 평화로웠다.
서울과 춘천 등지에서 촬영된 슬라이드 사진은 그 시절의 山河와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일부, 사진은 상태가 좋지 않아 편집, 수정하였으며 사진 배열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그는 1946-1947년 美軍政 요원으로 복무하고 귀국하였으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1951. 3. 다시 美 2사단 15야전포병대대에서 작전장교로 참전하였으며
무공을 세운 공로로 美 정부에서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Major Cecil B. White
(UNCONFIRMED - Citation Needed): Major (Field Artillery) Cecil B. White, United States Army,
was awarded a Bronze Oak Leaf Cluster in lieu of a Second Award of the Silver Star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in connection with military operations against the enemy in Korea,
while serving as Commanding Officer, 15th Field Artillery Battalion, 2d Infantry Division, on 3 March 1951.
(1) 1945. 8. 15. 일본의 항복으로 美軍이 진주하였다. 사진은 고이즈마에 주둔한 美 1기병사단.
(2) 일본 주둔 美 1기병사단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투입되었다.
(3) 일본 주둔, 美 7사단. 1946. 1950. 6.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美 7사단은 한국에 투입되었다.
(4) 일본 주둔 美軍 보충대.
(5) 일본 주둔 美 8군 사령부 영내 극장. <밤의 공포>, <코파카바나> 등의 영화가 상영중이며
Groucho Marx, Carmen Miranda가 주연한 <코파카바나>는 1947년 초에 개봉되었다.
(6) Barracks, Koizuma, Japan, 1946
(7) 오른쪽의 美軍이 사진촬영자, Cecil B. White 소령. Korea, 1946
(8) Cecil B. White 소령과 그의 전우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9) Cecil B. White 소령. 1946.
(10) Korea, 1946-'47
(11) Korea, 1946-'47
(12) 청평수력발전소. 19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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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청평수력댐.
(15)
(16)
(17) 청평호수,
(18) 설명에 의하면 사진의 안경 쓴 사람은 성이 이씨로서 미군부대의 통역사라고 한다.
(19) 통역사, 이씨 부부.
(20) 통역사 이씨의 부인.
(21) 통역사 이씨의 가족.
(22)
(23) 통역사 이씨는 미군 촬영자인 세실 B. 화이트 소령과 가까이 지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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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Photographer Major Cecil B. White & man. Christmas.
(26) Anthony Collier 신부(왼쪽). 딩시, 춘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와 신부로서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Anthony Collier 神父(1913-1950)
(27) Cecil B. White 소령.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에 대하여 일련의 이 사진을 올린 m20wc51님에게 아래의 질문을 했다.
me: Two men wearing white clothes are the priest?
m20wc51: I don't know who they are. Pssibly, their names are Garrity and Gallaher.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이름은 Garrity, Gallaher씨로 밝혀졌으나 직업은 알 수 없다.
(28) 1945년 8월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면서 춘천 지목구의 3분의 1이 북한으로 편입되어
번창하던 본당과 많은 신자들을 잃게 된 와중에 콜리어(Collier) 신부는 횡성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29) 그리고 1949년 1월 춘천(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으로부터 소양로 본당이 분리,설정되자 초대 주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소양로 본당에는 250여 명의 신자가 있었고, 관할 공소로 발산 · 금산 공소가 있었다.
글 출처 : 춘천교구 소양로 성당 홈페이지
(30) 설명은 없으나 춘천으로 추정된다.
(31)
(32) <사진 32~46>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소녀들과 아이들이 있는 이곳은 당시 천주교 춘천지목구
횡성본당으로 추정되며 Antony Collier 신부가 주임으로 사목을 했던 곳이다.
(33) 천주교 춘천지목구 횡성본당으로 추정된다. 1946-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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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진을 찍고 있는 세실 B. 화이트 소령과 소녀들. 천주교 횡성본당. 1946-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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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Anthony Collier 신부(1913-1950).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순교를 당했다.
(45) Anthony Collier 신부와 천주교회 횡성본당 신자들. 1946-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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