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長津湖) 전투
장진호(長津湖) 전투 : 美 해병 제1 사단의 장진호 전투 (1950.11.27∼12.11)
장진호 전투는 미 제8군이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제13兵團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에 예속되어 있던 미 해병 제1 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쳐 치른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유엔 공군의 항공 근접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미 제1해병사단은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후, 11월 2일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중공군을 물리치고 진격을 계속하여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하였고, 11월 16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달하였다.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미 제10군단장 Almond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로 정하고, 미 제1해병사단에게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여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미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 26, 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곧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하여 있다가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하여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미 제1해병사단 2개 연대에 투입된 부대는 4개 사단이었다. 이로써 장진호 전투가 전개되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인해 미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유엔군사령부는 11월 30일 전면철수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11월 30일 미 해병사단 주력은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하여 12월에는 2일에는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하였다. 하갈우리에는 스미스 장군 휘하에 약 1만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에게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하였다. 계속하여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중공군은 미 해병 2개 연대에 4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에 대하여 종전의 4개 사단에다 추가로 5개 사단을 투입하였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에 유엔군측에서는 공수 철수를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육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 때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대와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 때 해병대는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전사 2,500명과 부상 12,500명이 손실당했다. 이에 중공군 제9병단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 때의 피해로 유엔군의 한반도에서 철수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던 중공군 3차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자료 출처: http://www.mnd.go.kr/mnd/sub_home/Imhc/subpub_15.htm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 전쟁통계 (자료 인용, 한국전의 10대 전투)(The Chosin Few)
명칭의 유래
'Chosin'이란 장진호(長津湖, 북한 개마고원 인근)의 일본식 발음으로 맥아더장군의 전투지휘全圖가 日本語로 표기된 관계로 지금까지도 초신(Chosin)으로 불리우고 있다."Few"란 생존자란 뜻으로 The Chosin Few는 결국 장진호(長津湖) 전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조직이다.
조직활동
- 1983년 4월 22일 '초신휴' 단체창설
< 미 국세청, IRS에 의해 비영리단체로 공식인정을 받았다 >- 6,977명의 회원/미, 영등 세계52개 지부
- 2000년 한국 재방문 추진위원회 구성
자료출처: http://www.unmck.or.kr/cyber_affection/war/war_record.html
지도와 사진1) 지도: 한국전쟁 당시, 장진湖 전투, 흥남철수,
부산, 거제도등을 보여주는 당시 지도
(자료: 기적의 배)
빨간 점선이 中共軍이며 푸른 점선이 美軍측이다.
중공군(9兵團)이 美 해병2사단을 공격하고 있다.2) 사진: 1950년 12월 혹한의 겨울, 장진湖에서
흥남港으로 철수하는 유엔군
지속되는 혹독한 추위 또한 싸워야 할 무서운 적이었다. 추위로 인해 소총의 노리쇠가 얼었고 총신이 갈라졌다. 추위에 배터리가 죽어 버렸고 오일이 얼어서 차량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박격포의 바닥판이 깨졌고 땅이 얼어서 1인용 참호를 파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추위로 인해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이 마비됐다. ('기적의 배' 본문 86쪽에서)3) 사진: 1950년 12월 혹한의 겨울, 장진湖에서
흥남港으로 육로로 철수하는 유엔군4) 사진: 장진湖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국 공산군
장진호(長津湖)
장진호(長津湖) 전쟁화(戰爭畵).
기록에 의하면 그 시절의 기후는 영하 30~40도 내외여서 凍傷, 凍破 등으로 작전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오늘날의 장진호(長津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