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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 이야기(3)

fabiano 0 1359  

이 글은 김재영의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라는 소설의 일부입니다.

 -한얼미디어 출판-
조국광복의 발원지인 연해주를 분석하고 고려인들이 일구어 낸 황금같은 옥토을 소개 함으로써 민족긍지를 되살리고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독립투사들의 몸으로 던진 피흘린 대가이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잊고 있었던, 지금도 유랑신세로 떠도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을 재조명 하므로 역사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업적을 드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인식에 감히 포스트에 옮겨 보았습니다.초인류 인터넷의 강국이며 조선업과 반도체의 업적으로 세계의 위상에 우뚝 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건만 20세게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의 핏줄인 한민족이 저토록 아픈 질곡의 삶으로 아프리카 빈민보다 못한 비참한 실상으로 러시아 변방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아직도 버려진 우리민족인 고려인이 있다는 것에 슬픔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은 바로 고려인일 것입니다.
참고로 김재영의 소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생겨난 독립국가의 그 어느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동토의 땅에 뿌린 독립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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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수탈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은 처음에 작은 어촌인 포시에트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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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블라디보스톡 까레이스까야(구개척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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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한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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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 부대(쉬꼬도보, 1921)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이자,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의 '블라디' 는 '정복' 을 뜻하며 '보스톡' 은 '동방' 을 뜻한다. 또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으로, 지도상으로는 두만강을 넘어 해변을 다라 올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도시이다.
잔잔한 아무르만을 기고, 높고 낮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블라디보스톡은 인구 70만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더구나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민족과 인연이 많은 곳이다. 1900년대 초부터 1920년까지는 항일운동의 본산지였다. 블라디보스톡 시내 구석구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말기에 가난과 수탈을 피해 나룻배를 타고 두만강을 넘어 이주를 하기 시작한 한인들은 처음에는 포시에트라고 불리는 작은 어촌에 모여 살다가 이주민의 수가 증가하자 '해삼위(海參威)' 라고 불리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한다.
현재 극동기술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맞은편에 독수리 둥지처럼 보이는 작은 산이 있는데, 그 독수리 둥지를 바라보고 해삼위에 도착한 것을 알았으며, 지나모 스타디움 앞 구개척리 거리에 집단 거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구개척리에 러시아 기병대가 들어서면서, 한인들은 다시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때 아무르만과 산의 경사면에 동서로 6정, 남북으로 7정의 면적으로 '신한촌' 이라고 하는 한인들만의 마을이 탄생된 것이다. 이곳에 한인들들은 구들을 놓아 나무로 집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한글신문을 발행하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는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엘레나 상점이 나오는데, 그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동휘 선생이 사셨던 곳이다. 1907년에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던 안중근 의사가 근무했던 '대동공보사' 도 이곳에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크라스키노에서 단지혈맹으로 항일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후 대동공보 신문기자로 일하던 중,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최재형 선생에게 '나는 독립운동을 할 테니, 내 처자를 부탁한다' 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으로 떠났던 안중근 의사의 불타는 투혼이 눈에 그려진다.
그러나 일제는 1920년 4월 4일 0시 20분, 독립운동의 본산지였던 신한촌에 일격을 가한다. 당시 뻬르바야 레치카역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기병대가 야간 기습을 강행한 것이다.
모든 길목을 막고 눈에 한인이 보이면 무조건 총격을 가하였다. 한인 지도자 300명을 체포하여 볼세비키 지도자들과 함께 울리스만 바다에 수장하고, 수많은 한인들을 한인학교에 가둔 채 불을 질렀다. 얼마나 그 참상이 처참했던지 신한촌에 흐르고 있던 작은 시내가 그 날 밤 피바다가 되었고, 이튿날 아침 큰 마당과 큰 거리에 시체가 산과 같았다 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 러시아 아파트만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3.1독립 선언 80주년을 맞아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세운 3.1운동기념비가 애처롭게 서 있을 뿐이다.
요즘 이곳에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고려인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들은 왜 이곳을 찾아오는 것일까? 가난을 피해 고국을 떠났든,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났든 고려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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