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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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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니엘 2007.12.12 23:21

이 글은 김재영의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라는 소설의 일부입니다. -한얼미디어 출판-

조국광복의 발원지인 연해주를 분석하고 고려인들이 일구어 낸 황금같은 옥토을 소개 함으로써 민족긍지를 되살리고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독립투사들의 몸으로 던진 피흘린 대가이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잊고 있었던, 지금도 유랑신세로 떠도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을 재조명 하므로 역사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업적을 드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인식에 감히 포스트에 옮겨 보았습니다.
초일류 인터넷의 강국이며 조선업과 반도체의 업적으로 세계의 위상에 우뚝 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건만 20세게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의 핏줄인 한민족이 저토록 아픈 질곡의 삶으로 아프리카 빈민보다 못한 비참한 실상으로 러시아 변방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아직도 버려진 우리민족인 고려인이 있다는 것에 슬픔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은 바로 고려인일 것입니다.

참고로 김재영의 소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생겨난 독립국가의 그 어느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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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3가구의 한인들이 처음으로 러시아 땅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왜 까레이스키가 되었는가?
사람들은 가끔 '고려인' 이 누구냐는 질문을 네게 던진다.
1년에 한두 번 한국땅에 와서 연해주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 "고려인들은 왜 러시아에 살아요?" "이민 간 거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못살아요?" 하는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깊은 한숨부터 몰아쉰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어진다. 같은 얼굴 같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기껏 한 세기의 세월을 떨어져 살았을 뿐인데, 그 차이는 왜 이토록 크단 말인가?
왜 이렇게 서로를 모른단 말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답답한 체중이 생기곤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언론도, 정치도, 학자들도, 아무도 이들 고려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나역시 그랬다.


수많은 뉴스로 채워지는 TV와 신문들 속에서 고려인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수년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고려인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되면서, 우리와 한 민족이고 그들이 사는 연해주가 우리들 미래의 식량창고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눈을 돌려주고 있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고려인. 그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여행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고려인을 까레이스키" 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고려인의' 뜻이므로, '까레이스끼' 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부터 '고려인', '까레이쯔' 라고 불렸을까?

1863년 모두 13가구 한인이 처음으로 러시아 땅에 발을 디뎠다.
그 후 늘어나기 시작한 사람들은 1920년대 들어 한인마을 구성했고, 이때부터 활발해진 각종 간행물을 출판을 통해 '고려사람' 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또한 1927년에 발행된 <10월 혁명 10주년>에서 러시아의 한인들은 '고려인, 고려사람' 으로 표기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고려인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게 된다.
사실 이들이 이곳 '먼 동쪽나라' 를 뜻하는 '원동(遠東)' 이라는 이름의 연해주에 옮겨와 살게 된 데는 꽤나 긴역사를 가진다.

처음 러시아 당에 한인 13가구가 발을 디딘 것은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이 되던 시기와 연결된다.
당시의 연해주는 무인지경의 땅으로 광활한 신천지 그대로였다. 특히 연해주는 그 옛날 발해가 230여 년 동안 존재했던 바로 그 곳이기도 했다.
고려인이라 부리는 그들이 이 땅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처음 조선왕조는 이들에게 두만강을 넘지 말라는 '영(令)' 을 내렸다. 그러나 기근과 가난으로 너무도 '용감해져' 있었던 처음의 그들은 어느 날 두만강을 넘어 '포시에트' 라는 곳에 도착한다.
한인들 사이에 '목포' 라 불리는 포시에트는 작은 어촌 마을로 고향을 그리며 사는 고려인들의 첫 거주지로는 안성마춤이었다. 이 곳에서 한인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홤무지를 개간하며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 후 해마다 이주민의 수가 증가했다. 공식적 통계에 의하면, 1867년 한인의 수는 185가구 999명에 달했다.
2년 뒤인 1869년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사에 있어 기록될 만한 해로 한반도 북녘의 대기근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결국 '두만강을 넘어 원동으로 원동으로' 가는 것이 하나의 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량이민은 러시아로 하여금 한인사회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재고토록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한인들의 이민을 억제하기 시작했고, 한인촌에 모여 사는 사람들으으 러시아 전역에 흩어놓는 정책을 편다.
이로 인해 많은 한인들이 '슬픔의 강' 이라 불리는 수이푼강 근처로 이주하게 되었고 강제적으로 러시아 정교로의 개종이나 귀화를 종용하게 받게 된다. 쉽지 않은 러시아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맘대로 거주할 수 없는 신분상의 불이익, 억지스러운 종교 강요와 러시아인으로 귀화정책 속에서도 한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색깔을 잃지 않았다.
1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옛 명절을 그대로 지키고 있고, 노인들은 예스러운 언어들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살고 있다.

러시아의 이런 저런 정책 속에서도 1900년대를 넘어서면서 한인들의 수는 오히려 늘기 시작한다.
당시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로 망명이나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 덕에 1902년 러시아 내 한인 이민자는 무려 32,380여 명에 달했다.
게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연해주는 의병기지화 된다.
결국 이 같은 시작을 통해 연해주는 러시아 한인 민족운동의 중추로 거듭난다.


1907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의 망명길에 오르며 그 유명한 단지(斷指)혈명'이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 태어날 때부터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의 점을 달고 나와 '응칠'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 의사는 3월 5일 열두 명의 동지를 모아 '동의 단지회' 를 만든다.
연추하리에서 거행된 이 날의 단지혈맹을 통해 똑같은 손가락이 없는 열 두명의 독립운동가가 탄생한다.
모두 왼손의 무명지를 끊어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 를 세 번 외친 이 날의 맹세는, 이등박문을 죽이고 사형당한 안중근 의사의 몇 년 뒤를 예고하는 서막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한국 땅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 단지혈맹은 얼마 전 연추하리의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이 진행되면서 그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단지 맹세를 한 열두 명은 다음과 같다.

안응칠(안중근, 31세), 김기룔(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찬두(27세).

 
연해주에서 활동한 무수한 독립운동가 중 우리가 또 한 명 기억해야 될 이름이 있다.
바로 이상철 선생이다. 1906년에 이동녕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한 선생은 1917년 3월 2일(48세) 우수리스크에서 작고할 때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의 유언은 지금까지도 연해주 땅에 사는 사람이면 모두가 기억할 만큼 유명하다. 나라 잃은 설움을 모르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지들을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갈 수 있으랴. 내몸과 유품 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망국의 한을 강 건너 타국에서 보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말해주지 않는가.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사람, 결코 강 건너 불구경 거리로 지나쳐서는 안 되는 그들의 삶들, 오늘날 러시아 땅의 고려인을 두고 우리들이 갖게 되는 부채의식 또한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고려인들이 바로 그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합방 후 한인들의 이주는 더욱 많아진다.
그러나 1918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를 점령하고 국경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무려 7만여 명의 대부대를 투입하면서 한인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부터 연해주 고려인들의 항일운동은 빨치산 부대로 탈바꿈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바람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죽임을 당하는 한인들의 수도 무참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진행된 3.1 만세운동의 바람은 10일 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고,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톡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인다. 이로 인해 일본의 탄압은 극에 달했으며, 1920년 4월 3일 일본군의 신한촌 습격으로 이어진다.


이 때부터 홍범도 장군의 무장유격대의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그 후 1922년 볼로차예프카에서 그 유명한 일본과 러시아의 마지막 혈투가 벌어진다.
이 싸움에는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 부대' 가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부대원 전원이 전사하는 슬픈 역사를 남겼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은 연해주에서 물러나고 러시아는 급격히 소비에트 공산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불렀다는 노래는 지금도 가슴 속에 수이푼강이 흐르듯 애절한 느낌을 자아낸다.

고향생각은 더욱 간절하도다
돌아갈 길은 막막하도다

나라 잃은 설움에 찾아든 땅, 그 땅에서 남의 나라 군대가 되어 벌이는 전투, 그리고 죽음. 그 누가 이 노래를 지었을지 모르나 아마도 가슴속 설움이 뭉쳐 저절로 노래가 되어 나왔으리라.
돌아갈 곳  없는 사람들의 전투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고향산천은 얼마나 그리웠을 것이며 그 한은 얼마나 깊었을 것인가.

1929년 스탈린은 모든 사유재산을 몰수했고 공동분배, 공동경작의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한인들의 적잖은 반발이 있었으나 시대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변화시킨다.

사실 이 당시까지 한인들이 이룩해 낸 농사에서의 업적은 시로 '혁혁하다' 는 단어로는 부족할 만큼 큰 것이었다.

1905년부터 벼농사를 시작한 한인들은 이후 연해주 벼 재배의 90%를 차지할 만큼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연해주 벼농사의 시작과 끝을 이루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나름대로 기반을 잡아가고 있던 그들에게 새롭게 도입된 집단농업은 실로 킄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살기위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덕분에 1932년년도에는 오히려 모두 380개의 한인학교, 6종의 잡지, 7종의, 한인신문이 출현하는 민족문화 보존의 개가를 올리기도 한다.


보리 같은 사람들, 밟으며 밟을수록 더욱 푸르게 자산을 키워가는 사람들, 그들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다시 살아남는 사람들 아니 오히려 고통의 삶의 거름으로 바꾸어 낼 줄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소비에트 환경조차 오히려 더 많은 학교를 만들고 문화를 키워가던 그들도 1937년 그 고통의 서막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갈 수 밖에 없었다.

'한인들 중 일본인의 첩자가 있다.'
이 터무니없는 한 마디로 시작된 강제이주.
그러나 첩자는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역사는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치밀하고 정교한 사전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 가을. 긴 화물 열차가 18만 고려인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 기적을 울렸다.


*이 글은 <박환의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러시아 기행.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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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블라디보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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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가운데)은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후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되어
그곳 극장 청소부로 말년을 보내다 1943년에 돌아가셨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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