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야심의 여걸 서태후
fabiano
History &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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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2008.01.07 10:23
![[편집]01.jpg](/data/cache/blog/1515071862906785.jpg)
-1903년 베이징 서쪽에 새로이 지은 여름궁전(이화원)에서
환관들에게 둘러쌓인 서태후
청나라 말기 중국을 지배한 서태후(1835∼1908)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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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1-2-2.jpg](/data/cache/blog/1515071863743114.jpg)
1861년 자신의 다섯 살 난 아들 재순이 황제(동치제)에 오르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해 무려 3번이나 이를 이어가며 47년간
집권했다. 그의 권력욕이 황제들의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평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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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제 즉위 후 표면적으로는 황후(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에
나섰지만 동태후는 서태후에 대항할 뜻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대권’을 잡은 서태후는 50세가 되던 1885년에는 해군 부대의
예산까지 빼돌려 별궁 ‘이화원’을 짓는 등 사치를 부렸다.
그가 자신의 권력만을 탐하던 당시 나라 안팎은 어지러웠다.
아편전쟁(1840∼1842년) 이후 기아로 허덕이는 농민이 늘었고
서구 열강의 유린도 날로 심해지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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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1-2-3-1.jpg](/data/cache/blog/1515071866312006.jpg)
서태후는 짧은 기간에 ‘입신양명’을 한 여자다.
만주족 중급 관리의 4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난 서태후는 17세인
1852년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175cm의 당당한 체격과 사람을 압도하는 자태를 갖춘 그는
나약했던 함풍제의 관심을 끌었다. 후궁이 된 지 4년 만에 낳은
재순은 26세의 그녀에게 권력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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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머니에게 휘둘린 동치제는 결국 19세에 요절한다.
서태후를 잘 따르는 여자를 황비로 맞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네 살 난 조카 재첨을 황제(광서제)에 앉히고
2차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광서제가 19세에 결혼을 하자
친정(親政)을 허락했지만 실권을 놓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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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욕심을 부르는 권력의 속성은 유효했다. 젊은 지식인들의
개혁운동인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권력이 광서제로 기울 조짐이
보이자 서태후는 1898년 다시 수렴청정에 나선다.
권력을 위해 ‘동지’를 제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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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1-2-3-4.jpg](/data/cache/blog/1515071869810569.jpg)
함풍제가 죽은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때 공을 세운 공친왕 혁흔을
축출했고, 당시 그에게 협력했던 동태후도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
집요하게 권력을 유지한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인
1908년 11월 15일 73세로 생을 마친다.
![[편집]01.jpg](/data/cache/blog/1515071870824725.jpg)
포도도 1889년작
자희태후(서태후)가 반조음에게 내린 그림
![[편집]1-2-2.jpg](/data/cache/blog/1515071871917742.jpg)
국색천향(모란도), 1904년작
서태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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