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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江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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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麻露 작가의 말:
 
江은 흐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역사도 흐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민자들의 삶도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어느 순간의 얘기는 바로 한 세대의 삶의 현장이 될 것이다. 나중에는 빛바랜 추억으로 남아있겠지만 당시엔 치열했던 그런 시간들을 반추해 보는 거다. 그러나 결국은 흐 르고 말겠지. 그래서 江이라 부르고 싶다. 흘러 흘러가면서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는 그런 江. 조용 히 소리 내며 흐르다가도 때론 큰 포말을 일으키고 범람도 하며 살아있는 江. 모두가 너와 나 본연 의 모습이리라. 이민이란 파종(播種)이다.
전혀 다른 세계를 맞게 되면서 가치관과 질서의 혼란이 오 고 직업은 물론이고 가정의 위계도 바뀌게 된다. 당연한 사연이지만 그런 변화 속에는 또 아픔도 함 께 자리한다. 치유되기도 하지만 그 아픔에 함몰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민 오기 전의 관습, 이민 온 나라의 규범, 그 둘이 섞어져서 나오는 또 다른 형태의 현장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에 따라 성숙 하기에 이민 연수에 따라 또 다른 생각들이 어우러지며 갈등도 빗는다. 이런 이민의 환경 속에서 살 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담아보려고 했다. 흐르는 江처럼...
 
* 20년의 세월
 
민혜에게 진 신세를 다 갚지 못하고 군에 간 게 정말 억울했지만 꼭 그 신세를 갚아야지 하고 다짐 하곤 했는데 이렇게 만났고 민혜는 세 번의 남편을 가진 적이 있다니 어안이 벙벙해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독어 선생이나 중학교 영어선생이 되려고 준비도 많이 하던 민혜가 독일로 갔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후에 어떤 운명이 다가와서 그렇게 흔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태는 할 말이 없어 그저 묵묵히 듣는 입장이었다. 민혜의 말을 간추리면 민혜가 미국에서 만난 전 남편 오승일은 세 번째 남편인 셈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만난 셈이니 사랑타령을 할 처지는 아니었고 따뜻한 마음으로만 충분했다.
건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게으르지 않았고 별 취미생 활도 없이 열심히 생업에 매달리는 사람이었다.
브로드웨이와 60가 인근에 위치한 ‘잭스 마켓’은 이웃에 대형마켓이 없는 탓에 하루 종일 바빴다.
주 고객은 흑인인데 이들은 웬 종일 들락거리면서 맥주 1병을 사서 나갔다가 잠시 후면 다시 1병을 사는 등 하여간 마켓 인근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들이 가져오는 돈도 거의 페니라 헤아리기도 복잡해서 일일이 세지 않고 대충 어림짐작으로 받고 물건을 팔았다.
가게 출입구엔 차임벨 장치를 하여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딩동’ 하고 나는 소리도 하루 종일 듣다 보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다른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낮에 힘들게 일하고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오면 부부는 함께 저녁상을 마주하지만 많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마켓을 관리한다는 일이 거의 육체적 중노동이라 집에 돌아오면 꼼짝도 하기 싫었다.
더군다나 민혜 남편인 오승일도 말이 없는 편이었고 서당 선생처럼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는 보폭을 지닌 채 살아가는 타입이라 낭만적인 부분은 거세 당한지 오래인 사람이었다.
다행히 민혜가 음식솜씨가 좋아 이것저것 간단하게 주무르면 저녁 한 끼는 해결되었으며 기껏해야 반주 한두 잔으로 기분을 풀고 다음 날 가게에서 먹을 아침과 점심도 미리 챙겨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가게에 쌀과 전기밥솥, 밑 반찬은 미리 준비해두고 있기 때문에 국거리만 챙기면 되었다.
저녁 식사 후엔 TV 뉴스나 조금 보고 있노라면 바로 잠이 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고 어찌 보면 권태로운 생활이지만 그런 느낌을 가질 여유조차 사실 없었다.
평일엔 파트타임 직원 둘과 함께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30분까지 오픈 하기 때문에 12시간 노동은 두 사람에겐 엄청난 육체적 과로를 안겨주었다.
파트타임 직원들은 모두 유학생으로 오전과 오후 교대로 나오고 주말엔 또 다른 사람이 토, 일요일에 근무를 했다.
두 사람 은 한가한 시간을 틈타 가게 뒤 칸에 마련해 둔 간이침대에서 번갈아 가며 잠깐씩 휴식을 취하거나 낮잠을 자고 퇴근은 민혜가 1시간 정도 먼저 하면서 식사 준비를 해 두었다.


오승일에게 민혜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
오승일은 첫 번째 부인 제시카 오 사이에 낳은 딸 수진을 부인이 양육하기로 하고 생활비 일부를 보조하였고 가끔 바깥에서 만나 딸아이와 쇼핑을 가기도 했다.
이날 민혜는 우태에게 간단한 미국에서의 지난날을 얘기했는데 독일에서부터의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저녁 식사도 못하고 헤어진 이유는 우태의 다른 선약 때문이었다. 우태는 다음 날 바로 출장을 간다며 다녀온 후 다시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커피 한 잔으로 그동안의 공백을 메웠다.

* 제시카 오 부동산 에이전트 “여보 우리 마켓 이번 기회에 팝시다. 그동안 매상도 많이 올랐으니 권리금도 더 많이 받을 것이고 그럼 그 돈으로 이 동네 말고 좀 더 좋고 안전한 동네로 가든지 아니면 다른 사업을 하도록 말입니다.” “아니 이 마켓이니까 매상이 이렇게 오르지. 다른 데 가면 그게 어디 쉽나. 또 비즈니스를 찾는 다는 게 하루아침에 되지 않잖아. 몇 달만 빈둥거려도 매월 페이먼트가 얼만데 자칫하다간 번 돈 다 까먹고 나중에 초조해서 아무거나 잡다가 망치기 알맞지. 당신도 알지만 이 마켓도 전 주인이 흑인 이었고 장사를 대충해서 그렇지. 매상이 열심히 일 한다고 올라가나. 동네 사람들이 군것질 때문에 들락거리는 빤한 마켓인데. 동네 인구가 늘어나거나 그 사람들 수입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은 거지. 다행이 이 동네는 아직 미국 큰 마켓이 들어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들어올 기미도 없이 렌트비도 싸니까 이만한 돈도 버는 거야. 그런데 팔기는 왜 팔아?”
“아휴, 난 요. 이 동네 오는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파요. 당신 식사도 걱정이라 간혹 들리지만 정말 오기가 지긋지긋해요. 파킹장에서 부터 흑인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따라붙지 않나. 차에 흠집을 내지 않나. 어떨 땐 무서워요. 예전에 당신과 함께 마켓 문을 열고 닫고 할 땐 모르겠더니만 가끔 오려니 정말 그래요. 그러니 팔고 한인 타운에서 비디오 장사 같은 거 하면 안 될까요?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볼 테니 말이요.” “........ 글쎄 난 이게 좋으니까. 그냥 둬....” “아니 그렇게 고집 피울 게 아니잖아요. 내 생각도 좀 하고 수진이도 그렇지. 아빠 일하는 데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잖아요. 내가 바쁠 땐 혼자 집에 남은 수진이 생 각만 해도 불안해요. 그렇다고 당신이 수진이 데리고 가게 볼 형편도 안 되고. 해결은 파는 것 아니우.” “글쎄. 난 팔 수 없어요. 이거 팔아봐야 다른 데 가서 이만한 가게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망친다니까. 힘은 좀 들어도 확실한 비즈니스인데 왜 그래.” “아휴 저 고집. 알았어요. 그 대신 내 가 식사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원망 마세요.” 하며 제시카는 한 발 물러섰다.
제시카는 약 2 년 전부터 부동산 에이전트를 하면서 큰 수입은 아니나 그런대로 용돈과 생활비 일부는 충당하였다.
제시카는 미국생활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임했고 적응도 빨랐다. 초등학생인 딸 수진의 이름은 그 냥 둔 채 자신의 이름 신재희는 바로 제시카로 바꾼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성격도 활달하지만 흑인 동네에서 티셔츠에 청바지나 입고 대충 차리고 다니다가 좋은 차에 정장을 하고 미장원도 자주 다니면서 멋을 부리는 지금의 부동산 에이전트 직업이 훨씬 적성에 맞고 편하며 신났다.
수입도 마켓에서 부부가 함께 일할 때보다 자신이 빠져 나오고 대신 직원 1명을 두자 남편 오승일이 무겁고 힘든 일도 덜하게 되고 오히려 나았기 때문에 명분도 확실했다.
다만 몸이 건강하지 못한 남편 오승일의 식사와 잔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을 제 때 챙겨 주지 못하는 점이 미안했지만 대신 자주 한인 타운에서 맛있는 점심을 주문해서 먹도록 하였는데 이제 그마저도 지겨워 졌다는 의미이다.
부동산 에이전트 업무란 경쟁도 치열하지만 완전 서비스 업무이기 때문에 자신의 형편에 시간을 맞추기 어렵고 바이어나 셀러의 편한 시간에 움직여야 한다.
그런 탓에 시간이 많을 땐 많아도 바쁠 땐 정말 눈코 뜰 새가 없는 직업이다.
또 옷맵시나 언어, 용모 등에서도 남에게 뒤져서는 곤란한 직업이기도 했다.
부동산이란 공장에서 제조하는 물건이 아니고 모두 고정된 집이나 건물, 아파트, 비즈니스라 내 물건이 좋다고 선전할 수가 애초에 없다.
중개하는 에이전트는 심부름을 잘 하는 사람일 뿐이지 상품의 질을 높이는 기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을 팔고 사거나 건물이나 아파트 거래를 해 본 경험자들은 웬만한 부동산 에이전트보다 더 많은 상식을 가지고 있어 엉성하게 상대하다간 큰 코 다치기도 한다.
사실 부동산을 구입하는 구매자 입장에서 보면 시중에 나온 부동산이란 물건은 변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누가 친절하게 서비스를 하며 정확한 딜을 하는가의 문제이다.
에이전트가 바뀐다고 사려는 부동산 물건이 달라지지 않아 성실하고 유능한 에이전트를 찾으려고 한다.
구매자 입장에서 성실이란 남보다 전화 한 번 더 하고 한 번 더 만나고 어떤 오퍼라도 마다 않고 잘 받고 전달하여 해 결책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매매가 완전히 성사되면 에이전트는 에스크로 회사로부터 소정의 수수료를 받는데 부동산 중개업무가 에스크로 오픈에서 클로즈 할 때까지 각종 규제에 대한 검사부터 융자 승인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아 에스크로가 오픈되었다고 마냥 안심도 못한다.

에스크 로란 미국 부동산거래의 독특한 제도로 매입자와 매도자의 중간에서 모든 법적인 행위를 대행하고 제 3자로서 돈을 위탁 관리하는 권한 위임의 존재이다.
모든 부동산은 에스크로를 통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매매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된 제도이며 주택, 상가 건물, 사업체, 빌딩 가리지 않 고 이 절차를 통해야 안전하다.
제시카는 부동산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흑인 지역에 남편 혼자 두고 나오려니까 처음엔 불안하고 찜찜했으나 이젠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이 직업을 계속 갖고 남편으로부터 잔소리 듣지 않으려면 밤낮 열심히 뛰어야만 했다.
다행히 부동산 업계엔 여성들의 파워도 강했고 특히 주택 매매의 경우 남자 에이전트보다 유리한 점들이 더 많았다.
부엌, 거실, 주부동선, 정원 관리 등 살림살이에 대한 일반적 상식과 보는 눈이 여성이 더 섬세하기 때문이다.
제시카는 열심히 일 하면서 자력으로 자동차도 벤츠로 바꾸고 옷도 여러 벌 맞추었으며 미장원도 한 달에 두 번 이상 다니고 몸매를 가꾸는 스킨케어나 사우나도 자주 찾았다. 이런 외모 치장은 아주 기본에 속하는 업계의 매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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