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江 ⑦
fabiano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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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23:27
李麻露 작가의 말:
江은 흐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역사도 흐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민자들의 삶도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얘기는 바로 한 세대의 삶의 현장이 될 것이다.
나중에는 빛 바랜 추억 으로 남아있겠지만 당시엔 치열했던 그런 시간들을 반추해 보는 거다.
그러나 결국은 흐르고 말겠지. 그래서 江이라 부르고 싶다.
흘러 흘러가면서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는 그런 江.
조용히 소리 내 며 흐르다가도 때론 큰 포말을 일으키고 범람도 하며 살아있는 江.
모두가 너와 나 본연의 모습이리 라.
이민이란 파종(播種)이다. 전혀 다른 세계를 맞게 되면서 가치관과 질서의 혼란이 오고 직업은 물 론이고 가정의 위계도 바뀌게 된다.
당연한 사연이지만 그런 변화 속에는 또 아픔도 함께 자리한다.
치유되기도 하지만 그 아픔에 함몰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민 오기 전의 관습, 이민 온 나라의 규범, 그 둘이 섞어져서 나오는 또 다른 형태의 현장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에 따라 성숙하기에 이민 연수에 따라 또 다른 생각들이 어우러지며 갈등도 빚는다.
이런 이민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 들의 모습을 담아보려고 했다. 흐르는 江처럼...
* 국방부 시계
OB선장은 생맥주를 파는 대형 술집인데 가격도 저렴하고 분위기가 좋다는 경순의 설명이 있었지만 막상 들어서보니 맥주를 날라주는 아가씨들이 너무 예뻐 눈이 다 부셨다. 도무지 이런 장소에서 맥주를 나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여성들이었다.
늘씬하고 몸매도 쭉 빠졌지만 상냥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그저 그만이었다.
물론 손님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취객들의 야한 농담에도 생글생 글 웃으며 가볍게 넘어가는 자세가 참 아름답게 보였다.
우태는 완전히 촌닭처럼 행세할 뿐이었는 데 다행히 경순 후배가 알아서 주문도 하여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시종 얼얼한 기분은 떨치기 어려 웠다.
“아니 이런 예쁜 아가씨들이 다 어디서 온 거야? 정말 미인들이네. 경순 후배 덕분에 황홀경에 빠지는 기분이야. 서울 정말 좋다. 불과 2년도 안된 사이에 이렇게 달라졌나? 아니 내가 2년 동 안 너무 산골짜기에 박혀 있어 그런가? 야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술집은 왜 이렇게 넓지? 서울 운동장만 하네.”
“강 선배가 너무 사람구경을 오래 못해 그런 모양이네요. 허기야 군인과 함께 걸어가면 사람 둘이 걸어간다고 하질 않고 군인 하나, 사람 하나 간다고 한다면서요?
이곳의 아가씨들 다 예 쁘고 친절하지요. 이제 산업화로 진입하는 도시화의 한 단면일수도 있고요. 시골의 처녀들만 열리는 게 아니고 사회 전체가 열려가는 느낌이 듭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없어졌다 해도 그 잔재는 남 아있는지 상당히 막힌 느낌이었잖아요. 이젠 그렇게 닫힌 상태는 더 이상 아니에요.
강 선배 혹시 최 인호 선배의 ‘별들의 고향’ 조선일보 연재소설 읽어보셨어요? 소문에 의하면 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경아가 바로 이곳 출신이라는 겁니다.
최인호 선배의 창조적 상상이 이런 현실과 맞물린 거지요.”
“그래요? 난 간혹 읽어봤지만 참으로 문장이 좋더군요.”
“좋다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충격입니다. 케케묵은 문장에서 바로 바깥으로 나온 듯 한 신선함과 최인호 선배는 해방둥이답게 순 한글로 쓴 연재소설이 매회 마다 한편의 시를 읽는 기분이잖아요.
인기도 대단하지만 내용이나 문장이 정말 획기적인 소설입니다. 아마 사상 초유의 인기를 누리고 있지 않나 합니다.
심지어 이런 곳에서 일 하는 많은 호스티스들이 자신들의 가명을 경아로 바꾸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주인공이 호스티스에서 나중엔 대폿집 작부로까지 점차 전락하는 모습이지만 산업화 사회의 사각지대를 잘 묘사한 작품 이지요.” 하며 최인호 작가의 ‘별들의 고향’이라는 조선일보 연재소설에 관한 얘기들을 해주었는데 우태는 그런 소식을 듣는 것조차 흥분이 될 정도였다.
경순은 다시 “지금은 가을철이라 이렇게 손님이 들끓게 보이진 않으나 여름철엔 퇴근길 샐러리맨들과 방학을 맞은 학생들로 정말 바글바글 합니다.
또 맥주는 여름이 훨씬 더 맛이 시원하고 좋으니까요. 학교 앞 소주 집보다 가격이 더 싸요. 그래 서 우리 서클은 이곳에서 종종 모임을 가졌지요.
500CC짜리 생맥주는 값도 싸지만 맛도 참 신선하지 않아요? 맥주의 대량소비 시대가 왔다는 의미인데 이는 더 이상 막걸리 시대가 아니란 뜻도 되고, 말하자면 기존의 가치질서가 바뀌어가는 변화의 시대가 알게 모르게 왔다는 거지요.
군말 없이 적응해야 되지 않을까요? 예전 같으면 여학생이 처음 만나는 군인과 이렇게 오래 술을 마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학교 선배라 해도 말입니다.”라며 사회학 전공을 하는 학생다운 날카로운 면을 지적 하곤 했다.
우태는 취기가 올랐다.
아까 마신 소주에 맥주를 겁없이 마신 탓이다. 너무 좋기 때문에 술 맛이 더 났다.
오랜만에 사회의 공기를 들이켜며 후배 여학생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근사한 분위기의 술집에서 쭉 빠진 아가씨들의 서브를 받으며 마시는 술은 참으로 먹을 만했다.
좀 더 마시고 만취하여 밤새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OB선장은 불이 켜지고 문을 닫을 채비를 하기에 어쩔 수 없 이 둘은 일어섰다.
“우태 선배는 어디로 가실 거지요? 시간이 너무 늦었지요? 전 빨리 택시를 잡아야 합니다. 제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되고 내일 다시 시간 나면 전화주세요. 그리고 작품 주시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았죠?”
경순도 약간은 취해 있었지만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었다.
“이 부근 여관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육군본부에 들어가 일 본 후에 연락하지.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정말 기분 좋고 즐거운 날이었소. 촌놈이 출세한 기분까지 드니까. 하하하.”하고 큰소리로 웃으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처음 만났기 때문에 더 이상 붙들 수도 없었다.
생리적으론 여자가 꼭 필요하기 도 했지만 그렇다고 경순 후배는 언감생심이고 술이나 실컷 더 퍼마시고 싶었다.
가을 하늘은 밤이라 캄캄했지만 별은 총총 빛났다. 전방에서 보는 별과는 또 다른 별이었다.
강원도 전방의 별빛은 가깝지만 차갑고 시린데 서울의 별빛은 멀지만 따스하고 온화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면서 ‘별들의 고향’이라니 도대체 그곳이 어디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별똥이 떨어지는 하얀 포 물선을 보게 되었다.
우태는 ‘가을이란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그리움에 젖다니. 대상도 없이 까닭도 없이 이런 상념에 빠지는 것은 가을이라는 그 계절 때문일 게다.
민혜는 이미 떠났고 경순은 처 음 만나는 후배 아닌가.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저미나?
울고 싶다. 통곡이라도 했으면 속이 후련 하려나.
만추라고? 아니지 지금은 만만추인가? 늦은 가을 가운데서도 좀 더 늦은, 겨울이 바로 코앞에 서 있는 이 계절. 아마 10여일도 채 안 될 테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시점인가?
이건 계절도 아니야. 그냥 시간이야.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다 좋은 거야.
황혼이 가장 멋지기도 하지만. 어디 한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가을이야.
그래 지금 서울로 출장 온 것만도 행운이다.
전에 느끼 던 서울이 아니고 전의 가을이 아니다. 전방의 가을과 서울의 가을은 또 다르구나.
우거진 숲속의 낙엽과 휑한 거리 가로수의 낙엽이 이렇게 다르다니.
남들은 가을이면 산으로 올라가 가을을 느끼는 데 난 도심의 한 가운데로 내려와서 확실히 느끼는 구나. 서울의 무교동 그 가운데서. 별들의 고향 이 아닌 술꾼들의 고향에서 이렇게 훌륭한 가을을 보게 되었네. 내일은 명동으로 나가봐야지.
만약 경순과 함께 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아니면 혼자라도 가 봐야지. 그런데 군복을 입고 쪽팔리기도 하는데 사복이 없으니 할 수 없지. 그렇다고 시골까지 갈 시간은 없고......’ 어쩌고 중얼거리다가 여관 방으로 들어섰다.
군화를 끄르고 옷도 다 벗기도 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 독일로 간 민지 민혜에게.
민혜야 잘 있었지. 여러 식구들이 무척 궁금하게 여길 걸 잘 알면서도 이렇게 늦었어.
처음 외국에 오니까 모든 환경에 너무 서툰 탓이었겠지.
다행히 한국에서 목사님이 소개해준 분들을 만나 교회도 쉽게 정했고 또 교인들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단다.
음식도 이제는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탓인지 김치나 된장국 얻어먹기도 어렵지 않고 크게 불편한 점이 없어.
미리 먼저 온 선배 간호사 언니들의 고생과 억척 때문이겠지. 오히려 김치는 한국에서 먹을 때보다 훨씬 맛있어. 귀한 탓에 한 쪽이라도 아껴 먹어서 그런가봐.
독일이란 나라는 풍요하지만 결코 낭비와 사치가 없는 근검절약의 국가라는 사실을 짧은 시간이나마 느꼈어. 배울 점이야.
예전에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성냥불을 켜려면 네사람이 모여야 된다던 뒷말들이 전혀 근거가 없지 않아.
난 독일에 간호사로 오려고 했던 나의 선택에 대해 정말 잘한 결정이구나 하고 감탄을 할 정도로 만족해.
나 외에 대부분 간호사들도 다 그래. 신분이 상승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몇 년 전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와 서 함께 울며 잘살아보자고 외쳤다는 얘기는 여러 번 들었고 또 이를 말하는 사람도 몇 번씩 재방송 하는 거지만 마지막 부분에선 늘, 눈물을 흘리며 마감하지.
그만큼 잘살아야겠다는 명제는 절실한 거야.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향수와 그리움이야 왜 없겠어. 그렇지만 매월 마르크로 나오는 월급을 한국 돈으로 환산하며 느끼는 뿌듯한 보람은 이런 외로움을 물리치기에 충분하단다.
민혜야! 힘들 때 네 생각도 많이 하는데 꼭 이곳에 오도록 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하는 삶이 독일이 아닌가 한다.
일전에 발생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의 후유증도 심한가봐.
난 그 방면에는 문외한인데 교회에 가면 그런 소리가 자주 들려. 내가 다니는 교회의 젊은 집사님도 과묵하지만 불쑥 그런 말을 하기도 해.
좋은 청년인데 종교학을 전공하나봐. 그건 그렇고 어머니와 동생들에겐 따로 편지를 보낼 거지만 아저씨와 아주머님에겐 민혜가 대신 안부 전해줄래?
따로 인사를 드려야 도리이지만 똑 같은 소리를 여러 번 하는 것 같아서 좀 그래.
우선 잘 있다고 말이야. 이렇게 편지가 늦은 것은 난 아직 젊고 건강하고 목표가 있어 다른 간호사들이 개인적인 일로 주말 근무나 야간근무 를 못하게 될 경우 대신 맡아서 하였지.
그러다 보니 너무 시간에 쫓겼던 거야. 말하자면 시간 외 수당을 더 받고 일을 더 많이 한 셈이지.
이는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다 보니 소문도 나고 해서 점차 그렇게 되었어. 내가 받는 월급은 거의 한국에 송금하고 어머니가 적금을 잘 들어둔다고 하드라.
귀국하면 맛있는 음식 많이 사줄게. 그 보다 꼭 오도록 노력해, 알았지! 건강하고.
독일 베를린에서 언니 민지가 민혜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독일에서 등기편지가 왔다고 하면서 전해 주었다.
민지가 독일에 떠난 지 거의 8개월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