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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史,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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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회령 만세사건 주동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피신한다.

1년 후 간도로 돌아와 독립군 비밀조직 도판부에 가입하고
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
중동학교 재학 중 도판부 사건 혐의자로 체포되어 청진형무소에 수감된다.
감옥에서 독립투사 이춘식으로부터 춘사라는 호를 받게 된다.
만기출소 후 회령으로 돌아와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고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배우로 입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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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제2회 작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영화에 데뷔한다.
같은 해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심청전>에서 심 봉사 역을 맡는다.

1926년 계림영화협회에서 제작한 <장한몽>에 출연해 촬영 도중 화재사고로
부상을 입는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 <농중조>에 출연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이 해에 <아리랑>의 원작·각본·주연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풍운아>를 각색하고 감독하고 주연까지 맡는다.
1927년에 <아리랑>과 <풍운아> 필름을 가지고 고향에 가서
<야서(들쥐)>를 제작한다.

김택윤영화사에서 제작한 <흑과백>에 조연으로 출연하고,
<금붕어>를 각색?감독하고 주연을 맡는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하고 나운규가 중심이 된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창립작으로 <잘 있거라>를 제작(원작, 각색, 감독, 주연)한다.

1928년에는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와 1929년에는
<벙어리 삼룡>를 제작한다. 이 해에 나운규프로덕션이 해산된다.

1930년 찬영회 사건으로 연루되며, 원방각사에서 제작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의 주연을 맡는다.

미나도좌 연극부에서 연극공연을 하기도 한다.

1931년 도야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금강한>과
남편은 경비대로>에 출연한다. 1932년에는 원방각사에서
제작한 <개화당 이문>을 감독·주연하고,

유신키네마에서 제작한 <임자없는 나룻배> 주연을 맡는다.

극단 신무대에 가입하여 연쇄극 <암굴왕> 등에 출연한다.
1933년 대구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종로>의 주연을 맡고,
1934년에는 극단 형제좌에 소속되어 지방순회 공연을 다닌다.

조선키네마사에서 제작한 <칠번통 소사건>의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맡는다.

1935년 조선키네마사에서 제작한 <무화과>와 <그림자>,
한양영화사에서 제작한 <강 건너 마을>을 감독한다.
1935년에는 발성영화인 <아리랑 제3편>과 <오몽녀>를 각색,
감독하며 미발표 시나리오 <황무지>를 집필한다.

1937년 8월 9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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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사 나운규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선각자로서, 또한 항일 독립투사로서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조국과 영화에 불태웠다.”

초창기의 무성영화 시대에 있어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영화계에 투신하여 영화를 이끌어 온
영화인들은 많지만, 그 가운데도 오직 영화를 위해 태어나서 혼신의 정열을 불사른 이는 춘사 나운규라고 하겠다.

춘사 나운규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선두주자로서, 또한 항일 독립투사로서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조국과 영화에 불태웠다.

춘사 나운규는 우리 영화계에 있어 신화적 인물이었다.
우리 영화사에 있어 그의 위치는 너무나 뚜렷하고 확고하다.
그의 행적은 바로 한국 영화사 그 자체였다. 그는 부단히 노력하고 실험하는 영화인이었다.

외국영화를 보고 새로운 기법을 배워, 자기 영화에 실험을 했다.
<아리랑>에 사용한 상징과 비유의 몽타주 기법은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를 기획한 것도 그였다.

마지막 작품 <오몽녀>에서는 새로운 영상미를 창조하려고 노력하였다.
춘사 나운규의 영화 정신은 한마디로 말하여 피압박 민족의 저항 정신에서 잉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작품 활동을 한 것은 일제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던 시기였던 만큼 그의 항거는
곧 상징적 수법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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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으로는 <아리랑>(1926), <풍운아>(1923), <들쥐>(1927), <금붕어>(1927), <잘 있거라>(1927),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 <벙어리 삼룡>(1929), <철인도>(1929), <금강한>(1931),
<개화당이문>(1932), <그림자>(1935), <무화과>(1935), <강 건너 마을>(1935), <아리랑 3편>(1936),
<7번 통 소사건>(1936), <오몽녀>(193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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