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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수기] 내가 자란 北과 이상한 촛불시위

fabiano 0 1226  

  1981년 8월의 무더운 여름날 평안남도 평성시의 어느 평범한 한 가정에 세상을 향해 터뜨리는 여자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부부에게는 이미 6살 난 큰딸과, 3살 난 둘째딸이 있었으니 아빠에게 셋째 딸은 관심 밖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름 석 자도 없는 갓난아기는 태어 난지 이틀이 지나자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구토할 때 마다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대변에도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엄마는 그저 몸속에 있던 피가 아직까지 나오는가 보다고 쉽게 생각을 했지만 피는 점점 심하게 나오고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핏덩어리 같았던 빨간 몸은 거의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고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산모는 남편에게 아기를 큰 시병원에 데려가서 진찰을 받아보게 할 것을 부탁했다.

아버지는 포대기에 아기를 싸안고 산 너머에 있는 시 병원으로 향했다. 남한주민들은 북한에도 병원이 있고 구급차가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북한에는 남한처럼 119 구급차가 없고, 전화를 비롯한 통신망조차 없어 긴급연락을 할 수가 없다.

한편 아기의 아버지는 병에 걸린 셋째 딸이 별로 신경 쓰이지가 않았다. 왜냐면 이미 딸이 둘씩이나 있고 죽을지라도 별 아쉬움이 없다는 것이 그 아버지의 생각 인 것이다. 사실 아기가 태어 난지 3일이 지났어도 여태 한 번도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줄줄이 딸을 낳다보니 아쉬움도 있겠지만, 북한에는 남호선호 사상이 사회적으로 지배되고 있어서 일 것이다.

터벅터벅... 별로 급하다거나 걱정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아기의 아버지, 그는 산마루까지 올라가 숨도 돌릴 겸 바위 돌 위에 앉아서 마라초담배 한대를 말아 피웠다. 한창 담배를 피우는데 포대기 속에 싸여있던 아기가 꼼지락 거렸다. (자기도 생명이라고...) 갑자기 병에 걸려 점점 식어가는 그 아기의 모습이 궁금해 져 포대기를 들춰보는 무심한 아빠.

아기를 들여다보던 아빠는 멈칫 거렸다. 두 딸이 태어났을 때 보다 뭔가 느낌이 달랐고 갓난아기라고 하기엔 너무 예뻤다. 순간 그 아기를 잃어선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담배를 비벼 끈 아빠는 아기를 들춰 안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어 아기는 좀 더 빨리 시병원에 도착했고 검사결과는 <신생아 토혈 병>. 큰 병원에서도 여태껏 그 병에 걸린 환자는 아기까지 총 4명, 그 중 3명의 아기는 태어 난지 7일 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아기는 즉시에 입원실로 옮겨졌고 그때부터 전문의들의 관심 속에 집중적인 치료로 인해 40여일 후, 병을 깨끗이 털고 퇴원하게 되었다.

여자애는 아빠,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무럭무럭 자랐고 4살 때부터 예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14년 동안 “학생소년궁전 성악 및 화술소조”에서 타 소조 오빠 언니들은 물론, 지도원 선생님들의 관심 하에 거의 모든 연극의 주연을 맡으며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셋째 딸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아버지는 늘~ 업고 다니고, 구루마에 태워 다니고, 친구 집에 갈 때면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

그러던 1998년 봄,
몇 년 동안 계속되던 미 공급으로 인한 죽음의 돌개바람은 그 애의 집이라고 빼놓지 않았다.

막내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셋째 딸이 철들어서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접한 음식은 이밥과 고기 국에 맛있는 반찬이 아닌 젓가락으로 아무리 휘저어도 집을 것이 없는 멀건 국수 죽에 짜디짠 무절임 몇 조각이 전부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버지는 죽 한 사발을 냉수 마시듯 대충 드시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산에서 구를 뻔 했다”며 너덜너덜 다 해져서 발가락이 보이는 겨울 운동화 끈을 떨리는 손으로 푸시는 것이다. 순간 막내딸의 눈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불쌍한 아버지!

하지만 그 고난이 왜 생겼는지 왜 자기들이 그런 굶주림과 헐벗음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지 다는 알 수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마냥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느니 중국에 가서 뭐라도 좀 얻어 오리라고 아버지가 떠난 후 큰언니도 일주일동안만 중국에서 돈 벌고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남긴 채 떠났다. 어머니는 몇일 동안의 고민 끝에 둘째와 막내를 데리고 큰 딸 찾으러 집을 나섰다. 그렇게 되어 화목하던 한 가정은 하루아침에 풍지 박산이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 찾기”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중국 국경을 넘자마자 여기, 저기 팔려 다니고, 여기 쫒기고, 저기 쫒기면서 흑룡 강성의 어느 깊은 산골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그들이 원해서 팔린 것도 아니요~ 그들이 원해서 쫒긴 것도 아니었다. 다만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 옛날처럼 한집에서 살고 싶었던 그 마음이 죄였던 것이다.

글로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 간신히 큰 딸은 찾았지만, 중국의 어디에서 헤매고 계실지 모를 아버지를 또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것이 가족이였고 사랑이였다.

그러나 숨어살아야 하는 탈북자들의 운명은 그들의 의지대로 호락호락 하지 만은 않았고 행방이 묘연한 아버지를 찾아 낯선 중국 땅에서 방황한지도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딸들은 농사를 하면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은 고통 속에서 더 이상 지탱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점점 아버지를 찾는 것 보다 먼저 생존이 급선무였고 그 길은 한국으로의 탈출, 그것 뿐 이였다.

2002년, 엄마와 딸 셋은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북경에 있는 한국영사관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 대사관경비원들과 몸싸움도 벌어졌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그들의 영사관진입을 공안들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여기 찢기고 저기 찢기면서도 그들은 더 이상 물러 설 수도, 포기 할 수도 없었다. 벌써 정문입구엔 110(공안)차가 서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4명의 여자 모두는 영사관진입에 성공했고 그 후 100일간의 영사관 생활을 거쳐 2003년, 그렇게도 갈망하며 그리던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한국에 입국한 후, 그녀들은 북한의 실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사실 북한 내에서는 당국의 선전선동과 감시, 통제로 인해, 인간의 알권리가 모두 무시당한다. 노동당이나 그 하부단체들에서 조직적으로 선전하는 말 외에는 나라 안팎의 소식을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살면 “우물 안의 개구리 마냥” 무지몽매 화된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인간 생지옥 이였던 것이다.

한국으로 입국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면서도 딸들은 언제한번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었다. 배불리 먹을 때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멋진 남성복을 볼 때도 딸은 아빠가 그리워 엄마 몰래 울기를 수십 수차례, 그들은 아빠가 이 세상 어느 끝에 계실지라도 꼭~ 살아만 계셔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어느 날 북한에 있는 친척들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 그는 아버지에 대한 청천 병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가족 모두가 한국에 넘어 온 것을 아신 아빠가 재중 한국영사관에 들어가다가 중국공안에 잡혀서 북송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소식은 감옥에서 온갖 고문 끝에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셨고, 그 시신을 아버지 누나인 고모님이 확인하셨다는 것이다. 중국에 계실 아버지를 찾겠다고 둘째언니와 함께 KBS1 방송에 출연 한 것이 화근 이였다.

북한은 한국으로 간 탈북자들이 있는 가족들을 엄하게 감시하고 처벌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정일 정권이 남한주민들에게 “우리민족끼리”라는 주장이 그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분명히 말해준다. 같은 민족끼리 남한에서 살면 어떻고, 북한에서 살면 어떻단 말인가? 그런데도 가족 중에 남한으로 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엄중한 연좌제 처벌을 가한다.

김정일 독재정권이 순수한 감정으로는 믿을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남한주민들은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너무 배가 고파서, 그저 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죄가 된다고 처벌한다면, 그들을 노예처럼 붙잡아 고문, 공개총살, 강제노동을 강요하는 자들은 대체 누가 처벌하는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죽어가는 저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줄 나라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과연 누가 저들을 지옥의 구덩이에서 구원해 준단 말인가?

이번 촛불시위도 그렇다. 그 촛불을 북한주민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지금도 죽어가는 북한주민들을 위해 불을 치켜들었다면, 감히 김정일 독재정권이 북한주민들을 마구 잡아 죽일 수 있을까?


정말로 순수한 시민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승냥이의 꼬리를 감추고 있는 그런 친 북파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 여러분, 저 소리 들립니까? <이번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북한 온 지역 신문에 떠벌이고 좋아라! 손뼉 치는 김정일의 저 웃음소리.

한번만 다시 뒤돌아 봐주세요. 여러분들이 서 계시는 자리가 문화제의 촛불집회 자리인지 아니면 친북파들의 계획적인 묘략에 의한 촛불집회 자리인지를...(http://www.freenk.net/)

탈북자 한정숙(2003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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