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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농부 서연의 생태산문] 이 풍진세상, <장자> 읽던 제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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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자취를 감춘 하늘 아래서 인간은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사슬이 끊어진 생태계는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종적 없이 사라진 새들의 지저귐을 추억하며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겨들었다.
초봄에 거처를 옮길 심산으로 이삿짐을 꾸렸다. 옷장을 정리할 때였다. 서랍을 여니 새물내와 분내가 물씬했다. 그 속에는 두 해 전 다녀가신 어머니의 옷과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어떤 세안용품의 광고 문구는 ‘꽃을 든 남자’였다. 그 문구에 흠칫했다. 팔순을 앞두신 어머니한테서 ‘모성’만 보아오다 문득 ‘여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자식이란 노모한테서 ‘여성’을 쉬 읽지 못한다.

알라꿍달라꿍한 옷들 사이로 양말도 보였다. 양말은 여년묵은 듯 빛이 바래고 해졌는데, 어린아이 양말처럼 퍽 작았다. 어머니도 젊었을 때는 발이 작지 않았다. 무릇 생명 있는 존재가 쇠락할 때는 그 몸피부터 줄인다. 어머니께서 저물고 계셨다.

마음이 적이 허수한 채 이삿짐을 마저 갈무리할 때였다.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방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몸이 절로 무춤했다. 새는 놀랍게도 제비였다. 둥지 틀 곳을 찾다 얼김에 들어온 것일까. 제비가 내 산골 집을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살이 잡히던 아침, 바지랑대로 받친 빨랫줄에 제비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는 했다. 바로 그 제비인 것 같다.

제비는 애면글면 날개를 퍼덕이며 천장 밑을 날았다. 미닫이문이 열려 있건만 제비는 그 문을 찾지 못했다. 나는 뒤란으로 통하는 격자문까지 문을 죄다 열었다. 그러고는 재우쳐 방을 빠져 나왔다. 제비에게 불안감을 덜어줄 요량이었다.

밖에서 한참 머무르다 방에 들어가 보니 제비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방바닥 서너 군데에 물찌똥을 싸놓고 떠났다. 검은색 테를 두른, 생굴처럼 하얀 똥이었다. 그 똥도 퍽 오랜만에 보았다. 문득 마음이 정처를 잃고 일손이 뜬다. 누구는 길 떠나는데, 이 손은 또 어쩌자고 이 집에 찾아온 것일까.

이상(李箱)은 단편 <봉별기>에서 첫 문장을 “스물세 살이오. 삼월이오. 각혈이다”라고 썼다. 당시 내 마음을 그에 빗대자면 “농부요. 제비 돌아온 춘삼월이오. 길 떠나오”라고 했을 법하다.

삼월의 들녘에는 이미 봄뜻이 그윽했다. 마칼바람이 소슬하게 불기는 했지만, 우금에는 눈석임물이 흐르고 논밭 두렁은 봄물에 질척하니 젖어 붉었다. 마을사람들은 밭에 쇠두엄을 봉분처럼 쌓고 있었다. 종내 농사철이 시작되었다. 그 어간에 길 떠난답시고 짐을 꾸렸으니, 내 품새가 사뭇 열없었다.

농사짓고 살면서 적막하고 두려운 일도 겪는다. 이 풍진세상, 제비가 찾아오지 않는 일도 그렇다. 제비한테 딱히 정분을 두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제비가 오지 않는 봄이, 인간중심의 생태계에 불길한 조짐처럼 보였다. 마치 석축에 밑돌 하나가 빠져 큰 구멍이 난 양, 제비의 빈자리는 노상 컸다. 누군가가 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격언은 말한다.

제비를 떡밥 삼는 인간의 소행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딴은 옳다. 그러나 제비가 아예 오지 않는 봄은 어떤 봄일까. 귀농한 이래 제비를 몇 번이나 보았던가. 몇 해 전 남도의 한 선원(禪院)에 머무르다 하산하던 길에 처음 보았고, 이후 강원도 평창 읍내 한옥과 장평의 버스터미널에서 본 게 전부였다.

기실 볼 수 없는 새는 제비뿐 아니었다. 어릴 적 불렀던 동요에 나오는 새 중에도 종적을 알 수 없는 새가 여럿 있었다. <오빠생각>에 나오는, ‘뜸북 뜸북 뜸북새’의 뜸부기도 볼 수 없었다.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겨울밤>의 부엉이, <소리개 떴다>의 솔개도 마찬가지였다.

뜸부기는 여름철새다. 나는 이 새를 중학시절 초여름에 들녘 못자리에서 본 후 다시금 보지 못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부엉이는 텃새인 수리부엉이를 말한다. 수리부엉이가 “부엉!” 하고 울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내 사는 산골에서는 겨울밤 수리부엉이 울음소리를 몇 번은 듣는다.

그러나 산골에 살더라도 그 울음소리 한 번 듣지 못한 농부도 많다. 겨울철새인 솔개 역시 동요 속 새로 남았다. 요즘 어린이들이 이런 동요를 배우더라도 그 새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 해 초여름이었다. 평창 관내 장평 버스터미널에 들렀을 때였다. 터미널에서 일을 보던 중년 사내가 얘기 끝에 붉으락푸르락 말했다.

“이눔의 인간, 걸리기만 해봐라. 다리몽디를 분질러 놓겠다.”

사내가 하는 말을 듣고 일의 매개를 보아하니, 터미널에는 제비가 해마다 찾아와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가 올해 튼 제비집을 통째로 떼어가 버렸다. 그 제비집 속에는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제비새끼가 여러 마리 들어 있었다.

어찌하여 그런 무도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당시 터미널에는 제비집이 정면 출입구 천장과 건물 뒷벽에 한 채씩 있었다. 정면 쪽은 출입하는 사람이 많아 제비집 바로 아래에 ‘제비당반’이라고 부르는 받침대를 받쳐놓았다. 제비새끼들이 똥을 싸기 때문이다. 건물 뒤쪽은 차도여서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떼어간 제비집은 그 뒤쪽에 있던 둥지였다. 뒷벽에는 제비집을 떼어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내의 말인즉슨, 낚시꾼 소행 같다고 했다. 낚시할 때 제비새끼의 살코기를 떡밥이나 미끼로 쓰면 고기가 잘 문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제비고기를 쓰면, 관(貫) 고기를 낚는다”는 말도 그런 속설에서 나왔다. 한 관은 여섯 근이 넘는 무게이니, 그만큼 물고기를 많이 낚는다는 뜻이다.

떡밥은 물고기를 불러모으는 집어제이고, 미끼는 낚싯바늘에 꿰는 물고기 먹잇감이다. 제비 살코기를 떡밥이나 미끼로 쓰는 까닭은 그 살코기의 비린내 때문이다. 고기 구울 때 냄새가 고약하면 “제비고기라도 굽나?” 하고 말하는 내력에는 바로 그런 뜻이 담겨 있다.

그 비린내는 때로 천적을 부른다. 구렁이· 족제비·고양이 같은 동물이 그런 천적이다. 속설에는 물고기 역시 그 비린내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방죽 같은 곳에서 제비 살코기를 미끼로 쓰면 자라와 ‘물구렁이’까지 달려들어 낚싯대를 채간다고 했다. ‘물구렁이’는 뱀장어를 두고 한 말 같다.

실제로 어느 떡밥회사 상품은 그 이름이 ‘제비떡밥’이었다. 물론 제비 살코기를 떡밥으로 쓴 상품은 아니다. 다만 낚시꾼들 사이에 제비 살코기가 전설적 떡밥으로 전해 내려와 그 ‘전설’을 빌린 것 같다. 제비 살코기를 떡밥과 미끼로 썼다는 속설과 터미널 사내 얘기에 그저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도대체 인간의 소행은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제비를 생각하니 십오 년 남짓한 오래 전 일이 떠오른다. 당시 방송사에서 일했던 나는 환경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터였다. 전남 보성 벌교에 유기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농부가 있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농법의 현장은 어떠할까. 그 현장을 답사하러 벌교를 찾았다. 그때 그 농부가 말했다.

“들녘에 나가보시오. 제비가 날고 있는 논이 바로 우리 논이오.”

처음에는 미심쩍었지만, 들녘을 둘러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둘레가 툭 트인 게 마치 팔풍받이 난벌 같던 들녘에서 제비 대여섯 마리가 날고 있는 논배미가 있었다. 논은 한 3,000평쯤 돼 보였다. 논배미를 둘러싼 논두렁에는 왕대나무가 군데군데 꽂혔고, 제비는 벼 위를 선회하며 곤충을 사냥했다.

“제비가 날고 있는 논이 우리 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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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약을 치지 않는 논이어서 메뚜기·사마귀·잠자리 같은 곤충이 많았다. 논 생태계가 살아나면서 먹이사슬이 복원됐던 것이다. 대나무를 꽂은 까닭은 대나무가 음기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햇빛과 같은 양기가 음기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벼가 실하다고 했다. 그 농부는 또 토양을 정화하려고 논흙 속에 숯도 묻었다고 했다.

그 농부 논을 둘러싼 다른 논을 보니, 겉은 그 농부 논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제비 한 마리 날지 않았다. 농약을 쳐 곤충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농부가 복원한 논 생태계를 외경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립환경과학원이 내놓은 자료를 보니 제비의 운명은 비관적이었다. 새천년 첫 해인 2000년, 제비는 100ha당 37마리가 서식했다. 2006년에는 22.7마리였다. 6년 새 무려 40% 가까이 줄었다. 농약이 가장 큰 빌미였다.

제비가 농약에 직접 해를 입기도 했지만, 생태계가 무너져 먹이사슬이 끊긴 것도 치명적이었다. 어떤 이는 예전에는 지천이던 그 제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자고 말한다.

지난해 국립공원관리공단 철새연구센터는 제비가 그 전해보다 16일이나 빨리 왔다고 발표했다. 지구온난화 현상 때문이었다. 중국 남동부나 동남아 같은 ‘강남’지역에서 살다 날이 더워지자 보름이나 일찍 바다를 건너왔다.

어떤 인간은 그런 제비를 ‘철없는 철새’ ‘철모르는 철새’라고 타박했다. 제비로서는 인간에게 되술래잡힌 꼴이었다. 제비가 삼월삼짇날 찾아와 중양절에 떠난다는 말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은 말한다.

“동물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이란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 인간은 깊은 고독감으로 영혼이 메말라 죽고 말리라.”

인디언은 오래 전부터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에게 경고해왔다. 라코타족 인디언인 ‘얼굴에 내리는 비(Rain in the Face)’도 묵시록 같은 말을 남겼다.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 동물에 일어난 일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

낱낱의 존재를 그물코에 빗대자면, 무수한 그물코는 서로 연결되는 순간 그 개체성을 잃고 만다. 그곳에는 마침내 그물망만 존재한다. 그 그물망 속에서 한 그물코는 다른 그물코와 상의(相依)한다.

명상의 잠언에서는 어떤 존재든 일인칭대명사인 ‘나’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고 말한다. 인도의 명상가인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도 말했다.

“‘나’라고 말하면, 그대는 신성모독죄를 범한 것과 같다. ‘나’라고 말하는 순간 그대는 이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다.”

이 명상 잠언은 ‘얼굴에 내리는 비’가 예언했던 말과 상통한다. 인간 역시 ‘인간’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 자연생태계 혹은 우주와 단절되는 게 아닐까.

나도 인디언이 말한 고독감을 겪었다. 마을 옆 평창강에서 수달이 사라져버렸을 때였다. 그 고독감은 깊어서 절망에 가까웠다. 수달은 어인 연고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마을을 뜨고 싶었다. 강을 사랑했으되, 수달이 사라진 강은 더는 강이 아니었다. 겨울 밤 수리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의 고독감도 마찬가지였다.

제비가 사라지다 보니 이제는 그 울음소리 듣기도 어렵다. 소쩍새 울음소리 때문에 우리 시가문학이 적조하지 않았다면, 제비는 또 고전문학과 설화에서 춘신(春信)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 그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제비가 등장하는 야사 하나가 떠오른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쓴 조선 중기의 선비 유몽인은 재담이 뛰어났던 것 같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람과 나눈 문답 중에 제비 이야기가 전한다. 유몽인은 “조선 제비는 사서삼경 중 <논어>도 읽을 줄 안다”고 말했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문구를 두고 한 말이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謂知之 不知謂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논어>와 <장자> 읊던 제비의 추억

대체로 제비 울음소리를 ‘지지배배’로 표현한다. 유몽인은 그 ‘지지배배’에 가탁해 제비가 <논어>를 읽는다고 말했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를 빨리 읽다 보면 ‘지지배배’와 그 소리가 닮았기 때문이다. 뜻만 갖고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문구가 더 있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는 ‘도(道)’란 인간이 헤아릴 수 없고 언어를 넘어 존재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한다.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장자>의 ‘제물론’에서 장자도 말한다.

“지지기소부지 지의(知止其所不知至矣: 알지 못하는 바에 그칠 줄 알면, 그것이야말로 지극하다).”

장평터미널에서 제비를 만났을 때, 한번은 제비집에 바투 다가가 어린 새끼를 관찰했다. 전선에 앉아 있던 어미 제비는 본숭만숭 딴전을 피웠다. 대신 쉴 새 없이 지저귀었다. 제비 울음소리에 맞춰 장자가 말한 ‘지지기소부지 지의’를 빠르게 외어보았다. 제비는 <장자>도 읽을 줄 알았다. 이 문구도 ‘지지배배’와 퍽 닮았던 것이다.

제비가 <논어>를 읽든 <장자>를 읽든, 이제는 그 울음소리조차 여간해서는 들을 수 없게 됐다. 제비를 생각하니 문득 귀가 가렵다.

2 Comments
드넓은 광야 2008.04.09 16:08  
인천의 어느 카센타에 올해도 어김없이 제비가 찿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모습을 봅니다 희안한 것은 그렇게도 작업장이 임팩소리로 인해 시끄러운데도 개의치 않고 드나드는 점입니다 퇴근시 주인의 배려로 셧터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먹이를 날를수 있도록 한점을 보면 흥부이야기가 떠오릅니다 ~~~~~~~~
fabiano 2008.04.09 16:16  
올해도 제 집의 우편물함에 콩새가 알을 4개나 낳았는데...이제 파괴돼가는 환경에 콩새가 천혜의 요새를 찾은 듯 합니다만 씁쓸한 생태계가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 다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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