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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의 전성기와 나운규의 <아리랑>

fabiano 2 1776  
영화 흥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1920년대가 한국 영화사에서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조선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1919년 <의리적 구토>(김도산)를 기점으로 일련의 연쇄극 제작 기간을 거쳐 1923년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윤백남)가 제작된다.
하지만 <월하의 맹서> 이후 조선 극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까지는 1-2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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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조선의 협소한 영화시장 상황에서 최소 7,8천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회수할 가능성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1923년 일본인 영화 흥행사 하시카와 코쥬가 <춘향전>을 만들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기우임이 판명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에 자극받은 단성사 대표 박승필은 단성사에 영화제작부를 차리고 <장화, 홍련전>(1924, 김영환)을 만들었는데
이 영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조선의 영화제작은 왕성한 활동기에 접어든다. 1924년 일본인 실업가의 출자자본이 토대가 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25년에는 윤백남 푸로덕션과 고려키네마사가 설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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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조선 무성영화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스타 중의 스타였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이제는 전설이 된 영화 <아리랑>(1926)이 있다.
<아리랑>이 한국영화사에서 전설이 된 이유는 단순히 이 영화가 특출나게 조선 민중들의 민족주의를 집단적으로 건드린
흥행 대작이었다는데만 있지 않았다.
이 영화가 한국영화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컷 백, 심리적 몽타주의 활용, 적합한 캐릭터와 연기 등 예술적인 측면에서
한국 무성영화를 한 단계 높여놓았다 점에 있다.
요컨대 예술적 완성도와 흥행, 사회적 영향력 모두에서 <아리랑>은 한국영화 최초의 빅 히트작이었다.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에는 <아리랑>의 여주인공 영희 역을 맡았던 배우 신일선의 회상담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 속에서는 감동한 나머지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있어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공전의 흥행을 기점으로 1930년대 초까지 조선 무성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영화사가 이영일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에 나온 작품 수는 80여 편을 헤아리며, 생겨났다가 없어진 영화사나 프로덕션의 수는
무려 40여 개 사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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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감독 나운규는 <아리랑>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며 무성영화 전성기를 이끌어갔다.
1925년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단역 배우로 출발한 나운규는 1925년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에서 심봉사의 역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이듬해 직접 연출한 <아리랑>을 통해 한국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이후 나운규는 러시아 용병으로 나갔다가 조국에 돌아왔으나 차가운 현실에 직면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르는 청년 이야기
<풍운아>(1926)를 비롯, <들쥐>, <금붕어>, <잘있거라>(1927년), <사랑을 찾아서>(1928), <벙어리 삼룡>(1929), <철인도>(1930),
<개화당 이문>(1932) <아리랑 3편>(1936), <오몽녀>(1937, 유작) 등을 만들었으나 <아리랑>의 성취를 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1937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나운규가 연출한 작품이 18편, 제작한 작품이 5편에 달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가 당시 영화사에서 차지하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2 Comments
푸른깃발 2007.07.21 07:03  
영화역사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 시절에는 결핵으로 죽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fabiano 2007.07.23 14:41  
모든 것이 열악했던 그 시절, 아까운 인재들이 결핵으로 많이 쓰러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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