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해방기의 한국영화(1945-1950)
홈 > 블로그 > 내 블로그 > 흘러간 영화 그리고
내 블로그

해방기의 한국영화(1945-1950)

fabiano 0 1639  
해방기의 한국영화(1945-1950)
 해방기는 조국광복의 감격시대이며 좌우 이념의 대립이 격화되던 이데올로기의 시대이다. 이같은 현상은 1948년 8월15일 한국정부 수립을 전환점으로 하여 더욱 선명해진다(이 글에서 해방 전기는 해방의 감격과 조국 건설에의 기대가 충만했던 정부 수립 이전까지를, 이후 분단 상황이 고착화 되는 시기는 해방 후기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해방 전기 한국영화의 특징은 이른바 ‘광복영화’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영화는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새조국 건설에의 기대와 소망을 다루거나 한국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애국지사들에 관한 영화로서 해방기의 시대 분위기와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1515008338989978.jpg

① 해방의 감격과 새조국 건설에의 기대를 담은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해방된 내 고향>(전창근, 1947), <새로운 맹서>(신경균, 1947), <민족의 새벽>(이규환, 1947), <민족의 성벽>(전창근, 1947), <독립전야>(최인규, 1948)
② 애국지사나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준 인물들에 관한 영화: <안중근 사기>(이구영, 1946), <삼일혁명기>(이구영, 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 1947),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 <유관순>(윤봉춘, 1948), <패자의 수도>(유장산, 1947), <민족의 절규>(안경호, 1948)

해방 후기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이념적 대립국면을 드러낸다. 기록영화 <여수순천반란사건>(1948), <북한의 실정>(이창근, 1949), <무너진 38선>(윤봉춘, 1949)과 극영화 <전우>(홍개명, 1949),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나라를 위하여>(안종화, 1949) 등이 그것이다.

한편 해방 후기는 한국영화가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나마 새로운 시도와 혁신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16mm 컬러영화인 <여성일기>(홍성기, 1949)와 흑산도 올 로케이션 작품인 <파시>(최인규, 1949), 공중촬영을 시도한 <안창남 비행사>(노필, 1949), 뮤지컬 <푸른 언덕>(유동일, 1948), 변사의 신파조 해설로 유명한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48), 해방기 수작 멜로드라마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 등 다양한 장르와 기술적 혁신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는 해방 직후 열악하기 짝이 없는 한국 영화 제작환경이 점차 개선되어 가면서 산업적 활기와 안정을 찾아가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1515008339650926.jpg

또한 해방기는 영화의 기술적 측면으로 보자면 가히 ‘잡탕의 시대’이다. 권일청의 <홍길동전>(‘신판 홍길동’이라고도 함)은 5막 10장의 연쇄극으로 제작되었으며, <삼일혁명기>, <해방된 내 고향>, <불멸의 밀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검사와 여선생>, <죄 없는 죄인> 등은 16mm 무성영화이다. 그런가 하면 <안중근 사기>같은 영화는 35mm로 촬영되었고, <여성일기>는 컬러영화로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현상은 촬영 기자재 및 생필름의 부족과 스튜디오 시설(특히 녹음설비)의 더딘 복구, 영화관의 사운드 장비 미비 등 영화제작의 물적 토대가 거의 붕괴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에서 극영화가 제작되기 이전에 등장했던 연쇄극이 다시 나타나고, 이미 1935년 <춘향전>(이명우)이 발성영화의 시대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성영화가 등장하고 변사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극장가는 미군정 당시 미국 8대 메이저의 독점 배급사였던 중앙영화배급사(중배)가 제공한 미국영화에 의해 잠식되었다. <시카고> (In Old Chicago, 20세기 폭스, 1938), <카사블랑카>(Casablanca, 워너브라더스, 1942),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 MGM, 1942) 등 미국영화가 연 1백 편 이상 상영되어 전체 상영 편수의 절반을 넘어선다. 이 수치는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해방 5년간 61편(1946년 4편, 47년 13편, 48년 22편, 49년 20편, 50년 전반기 2편)인 것과 비교해볼 때 얼마나 큰 물량인지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뉴스영화를 비롯한 기록영화와 문화영화의 상영이 두드러진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해방과 함께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되고 미군정은 미국 대외정책 및 군정청에 대한 홍보의 일환으로 뉴스영화의 상영을 장려했다. 군정청이 제공하는 뉴스영화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소개하는 <국도>, 전쟁의 참상과 미국의 활약을 보여주는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은 무엇을 가져왔나?> <대동아전쟁 기록집> <오키나와 소탕전> <유황도 결전기>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여론 환기와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나온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하는가?> <전후 대통령 선거> 등 다수이다.

또한 한국 감독들에 의한 문화영화 작업도 활발했다. <제주도 풍토기>(이용민, 1946),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 <희망의 마을>(최인규, 1948), <무너진 38선>, <북한의 실정>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 <해방뉴스>(1946), <조선올림픽>(1947), <고려방직>(1949) 등도 기억해 둘만한 기록영화의 면면들이다.

해방기 영화단체로 가장 선명한 활동궤적을 보여주는 것은 조선영화동맹이다. 조선영화동맹은 1945년 12월16일 결성되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공개 활동을 중지하면서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진 단체이다. 이 단체는 추민, 서광제, 김한, 강호 등 과거 카프 영화인들이 구심점이 되어 활동한 관계로 좌파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으나, 서광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념적 색채가 단일한 것만은 아니었다. 상부의 이념성과 하부조직의 전문성이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영화동맹은 국영화론 제기, 중배 비판운동, 통제적 영화법령 철폐운동, 예술과세 항의운동 등을 통하여 해방기 한국영화(산업) 현안에 대한 가장 논쟁적인 문제제기와 대안모색에 나서면서 당시 영화계의 흐름을 주도했다.
(조혜정/ 수원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0 Comments
Hot

인기 50년대 - 레이건, 몬로

댓글 0 | 조회 1,250
Hot

인기 Die Hard 4 - 8월 개봉(예고편)

댓글 0 | 조회 1,227
Hot

인기 Marilyn Monroe (19 장)

댓글 4 | 조회 1,695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484 명
  • 오늘 방문자 18,532 명
  • 어제 방문자 7,451 명
  • 최대 방문자 18,532 명
  • 전체 방문자 1,704,111 명
  • 전체 게시물 10,948 개
  • 전체 댓글수 35,463 개
  • 전체 회원수 74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