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처가(恐妻家) - 1958년도 제작
fabiano
흘러간 영화 그리고
8
1550
2007.05.21 14:53
제작년도 : 1958
제작자 : 김보철
제작사 : 고려영화사
감독 : 김수용
출연진 : 장소팔, 백금녀, 김영미, 박응수, 구봉서
곰탕집 대성관 주인 장소팔은 공처가인데 가뜩이나 여편네 말이라면 설설 기어야 하는 그가 요새와서는 바짝 더 얼었다.
맞은편의 서울 곰탕집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다가 딸의 혼사를 둘러싸고 내외간에 뜻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가정불화를 겪다가 마침내 남편의 기발한 착상으로 영업도 성황을 이루고 딸의 혼사도 원만히 해결되어
공처가 신세를 면하게 된다.
김수용 감독의 이야기.
시나리오를 펴 놓고 분석에 들어가니, 난감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곰탕집 사내들은 나태하고 매사에 소극적이라 가세가 기운다.
여장부인 안주인이 견디다 못해 전면에 나서지만, 가부장적 인식이 강해 어려움이 많다.
결국 여장부는 말 대신 주먹을 행사하며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바로 잡아 가계를 일으킨다는 줄거리.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연출의 묘를 살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방법 밖에 살 길이 없었다.
모든 출연자를 신인으로 캐스팅하기로 하고 여장부역을 찾아다녔다.
배우지망자 김정분을 만났다. 뚱뚱하지만 스포츠에 능하고 얼굴에 애교가 있었다. (그는 후에 백금녀란 예명으로 서영춘과 콤비를 이뤄 일세를 풍미했다. 뚱뚱한 여자 코미디언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 무렵의 영화 감독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도 커피를 안 마시면 이미지가 안 떠오른다고 횡포를 부릴 정도로 잘 나갔지만, 나는 매사를 앞장서서 행동했다.
촬영 현장엔 30분 전에 나가서 기다렸고 스태프, 출연진에게 “시간엄수”를 외쳤다.
재채기만 해도 멎을 것 같은 고물 카메라에다 조명기는 쇠뭉치 같은 소련제였고, 미제 필름은 1피트라도 절약해야 했다.
영화는 코미디였는데, 시간과 예산의 강박관념과 낡은 기재 때문에 감독의 가슴에는 늘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가 데뷔작에서 체험한 것은 영화는 첫째 재미있어야 하며, 제작시한을 준수하고, 예산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후 109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늘 최초의 경험을 되새기고 있다.
source : http://blog.empas.com/ho2994/20276432
맞은편의 서울 곰탕집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다가 딸의 혼사를 둘러싸고 내외간에 뜻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가정불화를 겪다가 마침내 남편의 기발한 착상으로 영업도 성황을 이루고 딸의 혼사도 원만히 해결되어
공처가 신세를 면하게 된다.
김수용 감독의 이야기.
1958년은 한국 영화가 74편 제작된 해였다.(한국영화 붐이라는 요즘도 한해 제작편수는 40편 안팎이다)
그 해 여름 나는 첫 작품 ‘공처가’를 만들었다.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국방부 영화과에 근무 중인 나에게 고려영화사 김보철 사장이 찾아와 “당신은 준비된 감독이니까 망설이지 말고 메가폰을 잡아요. 그 사이 단편영화도 잘 만들고 극영화 현장경험도 있으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현역장교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직속 상관인 선우 휘 대령(아직 소설을 쓰기 전이었다)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나를 극영화 지방촬영에 참가시켜 주기까지 한 분이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모르는 척 한달 휴가를 준 선우 대령 아니었으면 나는 감독이 되지 못 했을 것이다.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국방부 영화과에 근무 중인 나에게 고려영화사 김보철 사장이 찾아와 “당신은 준비된 감독이니까 망설이지 말고 메가폰을 잡아요. 그 사이 단편영화도 잘 만들고 극영화 현장경험도 있으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현역장교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직속 상관인 선우 휘 대령(아직 소설을 쓰기 전이었다)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나를 극영화 지방촬영에 참가시켜 주기까지 한 분이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모르는 척 한달 휴가를 준 선우 대령 아니었으면 나는 감독이 되지 못 했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펴 놓고 분석에 들어가니, 난감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곰탕집 사내들은 나태하고 매사에 소극적이라 가세가 기운다.
여장부인 안주인이 견디다 못해 전면에 나서지만, 가부장적 인식이 강해 어려움이 많다.
결국 여장부는 말 대신 주먹을 행사하며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바로 잡아 가계를 일으킨다는 줄거리.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연출의 묘를 살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방법 밖에 살 길이 없었다.
모든 출연자를 신인으로 캐스팅하기로 하고 여장부역을 찾아다녔다.
배우지망자 김정분을 만났다. 뚱뚱하지만 스포츠에 능하고 얼굴에 애교가 있었다. (그는 후에 백금녀란 예명으로 서영춘과 콤비를 이뤄 일세를 풍미했다. 뚱뚱한 여자 코미디언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 무렵의 영화 감독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도 커피를 안 마시면 이미지가 안 떠오른다고 횡포를 부릴 정도로 잘 나갔지만, 나는 매사를 앞장서서 행동했다.
촬영 현장엔 30분 전에 나가서 기다렸고 스태프, 출연진에게 “시간엄수”를 외쳤다.
재채기만 해도 멎을 것 같은 고물 카메라에다 조명기는 쇠뭉치 같은 소련제였고, 미제 필름은 1피트라도 절약해야 했다.
영화는 코미디였는데, 시간과 예산의 강박관념과 낡은 기재 때문에 감독의 가슴에는 늘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가 데뷔작에서 체험한 것은 영화는 첫째 재미있어야 하며, 제작시한을 준수하고, 예산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후 109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늘 최초의 경험을 되새기고 있다.
source : http://blog.empas.com/ho2994/20276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