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북한의 통일전선사업부 해부 ①
홈 > 블로그 > 내 블로그 > 북한(北韓)
내 블로그

북한의 통일전선사업부 해부 ①

fabiano 10 1225  

Ⅰ. 서론. Ⅱ. 통일전선사업부 신설배경과 대남전략의 변화단계

Ⅰ. 서론

 북한이 핵실험을 한 오늘날 남북관계는 더욱더 중요사안으로 제기된다. 특히 남북간 국력 차이로 체제경쟁이 무의미한 현 상황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도 남북관계를 주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오늘날 남북관계는 남한 정부와 북한 통일전선사업부와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정치, 경제, 안보, 민간교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북관계를 총괄하는 부서가 바로 통일전선사업부이다. 더욱이 통일전선사업부는 대남공작부서들 중 대남정책을 기획하는 두뇌 부서로서 선두역할을 한다.

 이는 권력의 집중화를 통해 조직관리를 최대한 단순화하고 실용화하는 북한식 특유의 유일독재 방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는 북한을 알기에 앞서 통일전선사업부의 속성과 조직구성, 전략전술을 파악해야 한다.

 이 보고서는 통일전선사업부의 조직실체와 위장명칭들, 조직운영 방식, 기본적인 전략 및 전술 방향들을 서술하고 있다.

Ⅱ. 통일전선사업부 신설 배경과 대남전략의 변화단계

 1. 통일전선사업부 신설 배경

1515081717360348.jpg
 ▲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인 통일전선부가 지난 2001년 한총련과를 폐쇄한 것으로 나타났다.ⓒ sachsreport.com
 통일전선사업부(오늘날 한국에서는 통일전선부의 약칭이라고 하면서 "통전부"라고 한다. 그러나 통전부의 정확한 명칭은 통일전선사업부이다)가 출범하기 전까지 사실상 북한의 대남전략 및 전술은 인민무력부가 거의 주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인민무력부 작전국은 산하 적공국을 내세워 파괴, 테러, 교란, 대남심리전들을 독점 감행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1970년 초 고려연방제(1970년 김일성이 내놓은 고려민주연방제
)를 내놓으면서부터 대외적으로나마 군의 강경 대남주도권을 일부 약화, 혹은 유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체제 자신감으로부터 출발한 북한의 고려연방제 전략에서 비롯된다.

 고려연방제란 그 본질에 있어서 북한이 체제자신감을 바탕으로 남한 내 대중혁명을 유도하는 적화통일 정책이다.

 김일성이 이렇듯 주동적인 흡수통일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당시 베트남전쟁에서 참패당한 미국을 보고 가진 전쟁자신감이었다.

 중국 방문 과정에 김일성이 우리가 전쟁을 하면 얻을 것은 통일이요, 잃는 것은 분계선뿐이라는 호전적인 말을 남겨 중국 정치인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또한 국내 상황으로 볼 때 김대중 전대통령이 통일문제를 대선공약으로 제기하여 많은 지지율을 획득한 점이 김일성을 놀라게 했다. 남한 내 민주화 운동과 통일열망을 잘 접목만 시킨다면 대중혁명 방식으로도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민주화 운동을 적화공간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종전의 힘의 정책에서 전술적 유화책으로 선회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여 남한 내 민주화 역량을 지휘 조정할 수 있는 지능부서가 필요했고, 이 전략전술을 별도로 담당 수행할 당 주도의 대남공장 부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통일전선사업부는 명칭 그대로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중심으로 북한, 남한, 해외를 비롯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체 형성이 주요 목적이다.

 이러한 사명으로 출범한 통일전선사업부는 이른바 김일성을 구심점으로 하는 민족통일전선체 형성을 위한 대남정책 및 전략전술을 총괄하는 부서로 부각되게 됐다.

 2. 대남전략의 변화

 북한의 대남전략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가. 1970년대 초까지는 무력통일이다.

▲ 무력 통일의 본질

무력통일의 본질은 한국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영토로 규정한 전제하에 미국의 식민지인 남조선을 무력으로서 해방한다는 초 강경정책이다.

▲ 배경

 6.25전쟁 후 북한 내 반한정서가 지배적이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북한 주민들의 반한 의식을 자극시켜 내부결속용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도 무력통일을 더 강하게 추진했다.

 또한 한국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던 당시의 국력을 바탕으로 힘의 정책을 노골화하였다.
소, 중의 영향권에서 파벌과 이념투쟁으로 분열되고 대립돼 있던 김일성 정권은 국제 냉정구도와 남북간 체제 갈등이 극도에 달했던 당시의 국내외 분위기를 이용하여 군을 앞세운 정치를 해야만 권력 정돈과 함께 정책 결정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말까지는 고려연방제 통일이다

▲ 고려연방제 통일정책의 본질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의 본질은 한국의 군사정권을 민주세력으로 정권교체를 하고, 그 정권과 연합하는 방식의 통일방안이다.

▲ 배경

 한반도에 분열이 정착되면서 무력통일과 같은 정면대응의 실효성이 불투명해진데 대한 우회적 대응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김정일이 당 조직비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확립을 선포, 수령 신격화 차우너에서 김일성을 통일의 구심점으로 선전하자면 김일성의 통일강령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여 이 시기 북한의 대남전략은 겅제성장에 기초한 체제 자신감으로부터 반일, 반미 업적을 위시한 김일성, 개인 인물 자신감으로 선회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배경은 베트남전쟁과 한국의 1960년 4.19 혁명이 북한 정권에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이 시기 대남전략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 군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교체하기 위해 정권을 상대로 진행한 물리적 강경전략과 민주정권 출범을 위한 대중준비 차원에서 대중을 상대로 진행한 민주주의 확산 및 민주주의를 이용한 적화통일 유도전략이었다.

 이 전략에 따라 통전부는 민주주의 운동을 폭력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지도세력 구축 및 대중을 상대로 민주주의 및 고려연방제 찬양 선동을 중점으로 대남 심리전도 전개했다.

 또한 남한에 민주정권을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차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육영수여사 피살사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아웅산테러 사건, KAL기 폭파사건 등을 감행했다.

 오늘날 한국의일부 시민단체들과 언론들이 KAL기 폭파사건을 안기부 자작극으로 몰아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다.

 물론 폭파사건 이후 김현희 문제를 성급하게 부각시킨 점은 군사정권에 유리한 분위기와 정치적 이익을 주었다는 면에서 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공작 및 공작채널 확보 등 언론에 모두 공개시킬 수 없는 정보부의 비공개 측면을 트집 잡아 김현희 사건 전과정을 안기부와 연계시키는 것은 일종의 정치무식이다.

 또한 진보시대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의도도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 1990년대 말 - 현재까지는 "햇볕정책 역이용전략"이다.

▲ "우리 민족끼리 전략"의 본질

 북한이 2001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우리민족끼리'전략을 공식 발표하기 전까지는 이념적으로 내세웠던 고려연방제 전략 범위 안에서 내적으로 이미 1998년부터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을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6.15정상회담 이후 민족공조를 부각시키며 '우리민족끼리'라는 표현을 쓴 다음부터는 저들의 대외적 통일전략을 "우리 민족끼리"로 공식화하였다. 때문에 오늘날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전략은 엄연히 햇볕 정책 역이용전략 연장선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위장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끼리 전략"이란 북한이 자국 내 현 경제난을 인정하고 정세가 성숙될 때까지 한국의 경제를 자국 발전에 잉요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규정한 "햇볕정책"역이용 전략이다.

▲ 배경


 "우리 민족끼리 전략"은 북한의 현 경제난으로 김정일정권이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피동조치 및 잠정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사회주의 동구권 붕괴로 우방국 지원이 절대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역이용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체제갈등을 주민결속에 이용하던 북한 정권이 대화와 교류로 나올 수 있었던 중요 원인은 독일식 통일을 원치 않는 한국의 국민정서와 그 기반에 토대하여 한국 정치권의 대북정책이 햇볕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장기화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체제유지 전략 차원에서 전면 개방이 아니라 특구개방 정책으로 경제난을 해소하려는 북한 정권의 국가발전 전략에도 부합되기 때문에 선택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피하고 국제적 고립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도 남한 끌어안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북한의 통일전선사업부는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끼리"이라고 하지만 오늘까지도 적들과 "끼리"할 수 없다는 체제원칙을 내세워 대내적으로는 "햇볕정책 역이용전략"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 "햇볕정책 역이용전략" 명칭은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발표한 1998년경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통일전선부에 햇볕정책을 역이용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서 그 명칭을 옮겨 온 것이다.

 이렇게 세 단계를 걸쳐 오늘에 이른 북한의 대남전략은 북한 권력구조 변화, 한반도 정세, 국제냉전 구도 변화, 한국 대북정책의 상대성과 맞물려 변화됐다고 볼 수 있다.

 무력통일은 물리적이었다면 고려연방제는 비교적 이념적이었으며, 오늘날 "햇볕정책 역이용전략"은 실리주의라고 볼 수 있다.

 3. 대남전략의 변화와 대남조직 구조의 변화

 가. 군 중신의 대남공작 시기

 1970년대 초까지 김일성 정권은 유일 지도체제가 확실하지 못했던 이유로 권력 실세들의 권력분담이 어느 정도 보장돼 있었다.

 6.25전쟁은 전후 북한의 국내 분위기를 군이 주도하게 했다.

 인민무력부는 당연히 권력주도 세력으로 부상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 당과 내각의 양대 권력 구조 속에서 인민무력부가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호전적인 무력통일 노선을 강하게 주장하며, 남침 도발을 계속적으로 감행했다.

 이 시기 대남공장, 대남침투, 대남도발 등 모든 대남정책기획 및 전략은 인민무력부 작전부의 주관하에 인민무력부 적공국이 주도했다.

 남북 긴장을 조성하기 위해 청와대 기습사건, 프에블로호 납포사건 등 강경책으로 일관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나. 군으로부터 당 중심으로 대남구조 변화

 1970년대부터 김정일이 당 조직비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권력은 당조직부로 집중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대남정책을 이용한 인민무력부의 권력주도 및 정책주도를 차단할 목적으로 김정일은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인민무력부의 대남정책도 당적 지도권에 소속시켰다.

 하여 인민무력부의 호전적인 무력 일관주의를 차단하고 한반도의 장기성 체제 대치 상황에 맞게 상징적으로 존재하던 당 대남부서를 정보수집, 대남침투, 인물포섭, 대남심리전 및 교란, 파괴, 등으로 분류하여 전담부서들을 신설했다.

 이때부터 당 대남부서는 각자 업무 특성에 따라 세분화되었고, 이러한 차원에서 당 안에 대외조사부(현 35호실), 사회문화부(현 대외연락부), 작전부, 통일전선사업부로 분류됐다.

 또한 그때부터 북한의 대남정책은 군의 대남정책이 아니라 당의 대남정책으로 고착되었으며, 인민무력부 적공국도 당의 영도를 받는 하부기관으로 전락됐다.

 1970년대 이후 육영수여사 피살사건, KAL기 폭파사건, 아웅산 테러사건들은 인민무력부가 아니라 당 35호실, 대외연락부가 주관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때문에 당 대남 공작부서들 중에서도 직접침투나 남한내 지하조직 결성을 주도한 대외연락부나 35호실이 기본 역할을 했으며, 통일전선사업부는 대남선전 및 심리전, 남북협상과 가은 부차적 역할을 담당, 수행하게 되었다.

 개별 간부들에 대한 김정일의 신입도는 곧 조직의 신임을 의미한다. 대남공작부서들 중 대외연락부 부장 강관주나 작전부 부장 오극렬에 비해 통일전선사업부 제1부부장 임동옥에 대한 김정일의 신임도가 떨어진 것도이런 이유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으로 부상하는 통일전선사업부

 사회주의 동구권 붕괴와 경제난은 북한으로 하여금 새로운 경제연합체 및 시장 확보를 요구했다.

 보다 문제는 외화부족 현사으로 국제시장 침투 및 합작체제 설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남한의 경제력을 이용하기 위해 "우리 민족끼리" 이념을 부각시켜야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미국의 대북 강경저책을 와해시키기 위해 한미갈등을 고취시켜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남북화해 카드가 필요했다.

 결국 현재는 남북대화 그 자체가 대남전략 및 생존전략으로 전환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최근 북한의 대남전략은 이전의 침투, 파괴 등 강성보다 대화를 앞세운 경제이익 창출, 인물포섭, 정보 수집, 교란 등 유연성 접근이 더 우선이다.

 하여 최근에는 대남공작 부서 중 유일하게 통일외교 명분으로 합법성을 주장하는 통일전선사업부의 기능이 강조되는 추세이다.

 또 다른 변화는 종전에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부추기기 위한 한국민족민주전선을 내세우며 음성적으로만 대남사업을 진행해 오던 통일전선사업부를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을 부각시켜 양성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북한의 궁극적 목표인 적화통일 정책과 대남공작 부서들의 사명 그 자체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워 직접대화와 교류를 통해 그들의 적화 목적을 보다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바, 현 북한의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목적은 크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남북과계를 경제적 이익에만 국한시키는 것, 둘째는 우리 민족끼리 이념으로 남한 내 북한지지 세력을 확산, 셋째는 남북화해를 전략화 하여 미군을 축출함으로서 적화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전에는 한국 내 민주주의 세력 확산을 목표로 대남심리전 및 대남 공작을 전개했다면 최근에는 친북 및 좌익, 진보세력 확산이란 보다 노골적이고 확대 지향적인 목표로 대남심리전 및 대남공작을 전개하고 있다.(konas) -계속-

 장철현(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북한의 통일전선사업부 해부 ②
written by. 장철현
Ⅲ. 고려연방제 전략 시기의 통일전선사업부
 고려연방제 전략에 의해 신설된 통일전선사업부는 전략의 목적대로 김일성을 통일의 구심점으로 한느 광범위한 전선형성에 초점을 맞춰 조직을 설계하고 공작을 추진했다.

 통일전선사업부의 주요 전략과업은 남한 내 민주화 운동을 부추기는 한편 적화공간으로 활용하여 고려연방제 전략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통일전선사업부가 남한 내 민주화 세력을 중시했던 이유는 민주화운동 그 자체가 곧 반정부운동이었고, 민족의식을 자극시켜 반미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통일전선사업부의 기본 공작 형태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심제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도 통일전선사업부는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의 초기 명칭인 "평양주재 한국민족 민주전선대표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북한을 통일의 주체로 선전하는 한편, 남한의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위장하여 거국적인 민주화운동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과거 조국평화통일서기국은 대화나 교류를 비롯한 통일외교 기능보다 한민전 활동을 조정하는 모략기지였다.

 통전부는 조국평화통일서기국을 앞세워 남한 내 민주화운동을 적극 부추기고 대남공작 목적으로 활요하기 위해 자기 조직들을 세분화 하였다.

 101 연락소(북한 대남공작 부서들 내 과들과각 연락소들의 명칭은 숫자화 하고 있다. 이는 조직의실체와 기본 업무 내용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위장형태이다. 연락소 명칭을 대체하는 숫자들은 김정일로부터 조직을 신설할 때 사인 받은 날짜를 그대로 사용하게 돼 있다.)는 일명 '대남 문화 친투연락소'라고도 한다. 북한은 월북 작가들을 모체로 1970년대부터 101 연락소에서 한국 작가 혹은 민중작가 명의로 된 소설, 시집, 수필들을 창작했다.

 주제는 반독재, 민주화 찬양, 고려연방제 찬양, 반미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제작한 문학작품들을 대학가들이나 서점들에 침투시켰다.

 또한 26 연락소는 남한태 실존하는 한민전 산하 '구국의 소리방송'으로 자처하면서 남한식 억양과 발음으로 훈련된 아나운서들을 내세워 민주화 운동을 호소, 유언비어 유포, 한국 정부의 정책에 대한 왜곡 등 전파 침투를 감행했다.

 뿐만아니라 연락소 내에서 운영하는 칠보산 전자악단을 이용하여 운동권 가요들을 창작하거나 한국의 유명 유행가들의 가사를 왜곡하여 전파를 통해 침투시켰다.

 지금도 운동권 가요들 중 상당수의 노래들이 작사작곡 미상으로 돼 있는 것은 당시 통전부의 문화적 침투의 흔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813 연락소는 출판연락소로서 남한에 실존하는 시민단체들의 조직 명칭을 도용하여 각종 전단지들과 도서, 인쇄물들을 제작하여 310 연락소를 통해 남한에 침투시키는 대남심리전을 감행했다.

 그 밖에도 월북자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지협의회를 통해 남한의 연고자들을 이용한 편지발송, 인문포섭 및 납치, 정보수집 등 대남공작을 벌려왔다.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적화통일로 역이용한 통일전선사업부의 공작 행태는 이렇듯 조직구성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통일전선사업부를 고발하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고발당하는 부분이 있다.

 남한내 "주사파" 확산, 아직까지 과거를 숨기고 있는 밀방북경력자들, 최근까지 거론되는 일부 386세대들의 과거 조선노동당 입당설, 반미, 국가보안법 철폐주장, 친북 및 좌익세력 확대 등은 결코 통일전선사업부의 민주화 역이용 공작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konas) -계속-

 장철현(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10 Comments
어여쁜 나 2016.11.21 20:50  
통전부소속 인사들의 생활수준도 현재 2016년 기준으로 볼때 우리나라의 1960년대~1980년대초반수준에 머물정도이며 그들이 살고있는 아파트들을 제가 위키매피아 위성사진에서 자세히보았는데 분당신도시에 있는 고급아파트보다 못한 수준이더군요?
fabiano 2016.11.22 21:24  
의견에 따릅니다.
어여쁜 나 2016.12.07 20:57  
아차 탈북자언론매체인 뉴포커스 운영자인 탈북자 장진성씨가 알고보니 북한에 있을때 통전부요원이 아닌것으로 드러났다네요? 이에대해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서는 그의 과거사에 대해 상세하게 글을 남겨났다는군요? 그리고 본인은 평양음악무용대학(현재는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 민족기악학부를 나오고 곧바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뒤 통전부요원으로 일했다고 주장을 해대는데 알고보니 그의 학력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통전부에서 일한전력이 없었으며 2004년 1월 북한을 탈출하기전 무려 5차례나 직장을 옮겼는데 모두 고위직과는 상관없는 직장으로 밝혀졌다네요? 물론 그의 본명은 위철현으로 북에서 전처와 아들 한명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여쁜 나 2016.12.07 21:00  
탈북인권운동가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ㅡㅡ;;;;; 어떻게 북에 있을때 자신의 학력과 경력을 감쪽같이 속인채 인권운동을 하니깐요~!!!! ㅡㅡ;;;;; 저는 정말로 쇼크먹었습니다~!!!!
fabiano 2016.12.17 00:15  
거~참~~...
어여쁜 나 2017.07.06 21:31  
우리나라 국정원은 우선 북에 있을때 학력과 과거경력을 모두 속인채 탈북하여 종편방송에 출연중인 유명탈북자들부터 먼저 조사를 해야될것같네요?
fabiano 2017.07.07 17:10  
자신을 미화하고 그럴 듯하게 포장해야 하니...
fabiano 2017.07.07 17:11  
조사할 필요성은 있슴다.
어여쁜 나 2017.08.11 22:06  
특히 주순영같이 북에서 평범한 노동자였던 여자가 김일성을 위해 예술공연을 했던 1호배우로 둔갑한 그여자부터 샅샅히 조사해야될것같네요?
fabiano 2017.08.14 11:22  
현 정권에서 그리 할까요?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219 명
  • 오늘 방문자 11,973 명
  • 어제 방문자 12,094 명
  • 최대 방문자 14,619 명
  • 전체 방문자 1,540,839 명
  • 전체 게시물 10,948 개
  • 전체 댓글수 35,462 개
  • 전체 회원수 73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