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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와 '花柳春夢'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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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어느 더운 여름날,  가요계의 대부격인 작곡가 김용환씨(김정구의 형)는 부평 어느술집에 노래 잘 부르는 작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평을 찾게 되는데 당시에는 아주 시골 촌이었다. 그곳 술집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열아홉살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서울에까지 소문이 났다. 이 소문을 듣고 그녀를 한번 봤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용환의 일행이 이화자가 있는 곳을 찾은 곳은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술집이었다.  술집을 들어서니 한 아가씨가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서 태극문양이 그려진 부채로 더위를 식히면서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이상해서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질번질하게 흐르며 영낙없이 메주를 뭉쳐놓은 것과 같고 또한 얼굴 전체에 땀구멍이 뻐끔뻐끔하며, 첫눈에 봐도 그녀가 너무나 못생겼다.

찾아온 것이 너무나도 실망스럽고 후회가 됐다. 그러나 어쪄랴. 이 먼 곳까지 찾아 왔으니 그냥 갈 수도 없는 일. 그렇다 해서 이곳에서 그녀와 대화하기도 난처한 일이었다. 기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노래라도 한 곡 들어보고 가자면서 이화자에게 술상을 차려달라고 주문하자 그녀는 술상을 차려왔다.

술 한 잔씩 마시고는 이화자에게 노래 한 곡조를  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술잔을 들어서 한 잔을 쭉 마시더니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한 곡조 간드러지게 부르는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생김새와 달리 목소리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지 않는가!  일행은 입을 딱 벌렸다. 이런 것을 보고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됐다 됐어  기뻐하며 이 정도면 민요가수로서는 손색이 없다고 판단을 했다.

이화자의 목소리에 감탄을 하면서 이화자에게 내일 서울로 상경할 것을 요청 하고 일행은 서울로 올라왔다. 이화자는 약속한 대로  이튿날 김용환을 찾아왔다. 김용환은 찾아온 이화자를 뉴코리아 레코드회사에 전속 가수로 계약을 체결하고 막바로 노래연습으로 들어갔다.  조명암 작사 김용환 작곡인 '초립동'이란 노래를 첫 작품으로 발표를 했다. 그리고 시장의 반응을 살피는데  신인가수로서는 뜻밖에도 반응이 기대보다도 좋았다.

이렇게 이화자는 가요계에 데뷔했는데 그뒤로 부르는 대로 힛트하여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노래가 계속 히트되자 그녀는 이때부터  콧대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나중에는 한량들이 그녀의 노래를 듣기위해 돈을 싸들고 며칠전 부터 예약을 해야만 했다

1940년 4월 신보에 '화륜선아 가거라'와   발표한  <화류춘몽>은  기생들의 신세를 노래한 것인데  발표되자 전국의 백화점은 물론이요 각 지역 레코드가게 마다  온통 이화자의 광고포스터와  화류춘몽 노래소리였다.

이화자는 '화류춘몽'에 자기의 신세를 목소리로 불어 넣었다 .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우수적이다. 가늘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슬픈 감정을 토해내는 소리다.  갸날프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은 비음을 살짝 넘어서 높은음을 꺾는 데도 살짝 꺾어넘기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를 가볍게 내품으며, 호흡으로 끝을 마무리를 한다. 구수한 목소리인가하면 갸날프고 우수적인 목소리, 그리고 간드러지게 울부짖는 듯, 흐느끼는 듯한 그녀의 슬픈 노래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여버린다. 이화자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가슴이 저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울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그녀의 독특한 창법과 목소리는 그 누구도  따라갈수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어려울것이다 .

이 노래로 장안에  자살 소동이 빈번히 일어났다
한강 다리에서 한 여인이 하얀 소복을 하고 고무신발은 나란히 벗어놓고 그위엔 써놓은 유서봉투를 놓고 투신햇는데 자살한 여인은 종로에 있는 모 빠에서 종사하는 종업원이라고 밝혀졌다.  화류춘몽이란 노래를 듣고 자기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며 현실이 너무도 비참하고  노래가 마치 자기의 처지와 같음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하게 됐다는 유서가 발견되어 신문에 보도 되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에는 마포에 있는 어느 술집의 화류계 여성도 양잿물을 먹고 자살했다. 이 여인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자기의 처지가 화류춘몽의 노래와 어쩌면 이렇게도 똑같은지 모르겠다는 유서를 써놓고  유성기에다  화류춘몽 레코드판을 틀어놓은 채 자살했다. 술집마다 화류계여인들은 술만 취하면 花流春夢을 부르면서 우는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서울에서 자살소동이 벌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연일 앞에서소개한 바와 같이 자살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총독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래서 총독부는 각 레코드회사에 판매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며 압력이 시작됐다. 그리고 끝내는 레코드업자를 판매금지에 협조를 하지 않는다 하여 잡아다 구류를 살리는가 하면 끝내는 시말서를 강요하여 받고서 풀어주는 등 이 노래로 인하여 세상이 시끌시끌하였다.

노래가 히트하자 이화자는 과거에 화류계에서 몸담았던 지난날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럴 때면 그녀는 술을 마시곤 했다. 술이라도 취하면 지난 과거를 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 뿐 술이 깨면 또다시 지난 과거가 그녀를 자꾸만 괴롭게 했다. 그러다 보니 담배도 골초가 됐다.술은 점점 더 마시게 되며 술로도 지울 수 없는 과거다 보니 끝내는 아편까지 손을 댔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이화자는 아편 없이는 한시도 견딜 수 없는 중독자가 돼버렸다.

한번은 중국(中國) 연변시내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중  사회자가  "다음은 우리 조선에서 최고의 민요가수인 이화자씨를 소개하겠습니다" 하며 소개하자 이화자가 무대 뒤에서 걸어나오자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로 그녀를 맞는다. 사회자가 이화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갑자기 비틀비틀 거리면서 무대에서 쓰러져 거품을 토하면서 바리작바리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사회자와 극단에 관계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와서 이화자를 들것에 실어서 무대 뒤로 나갔다. 이것을 본 관객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녀가 다시 무대에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에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무대는 막간 가수가 등장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시간이 흘렀다. 잠시후 이화자가 무대에 다시 나오고 사회자가 말한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사실은 이화자씨가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바쁜 일정으로 공연을 하다보니 밥도 제때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자 과로가 겹쳐서 잠시 쓰러졌습니다"

사실은 이화자가 쓰러진 것은 아편 기운이 떨어져서 무대에서 쓰러진 것이다. 이화자는 그날도 아편이 없었다면 공연을 못했음은 물론이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화자가 공연을 할 때면 악극단 단장은 항상 아편을 준비하여야 했다

이렇게 이화자는 멋대로 불행한 삶을 살다가 35세의 황금 같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49년 봄 어느 지방극장 무대에 오른 그녀는 '꼴망태목동'을 불러서 갈채를 받고 앙코르에 응답해서 '목단강편지' '어머님전상서'를 노래한뒤 일주일후 아무도 지켜보는이 없이 홀로 쓸쓸히 죽어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실제로 1950년3월24일 국도 악극단 무대광고에 출연자 이름이 올라있는 것으로 보아서 죽음은 그 이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가수 이화자는  어머님 전상서, 화륜선아 잘가거라.노래가락, 초립동, 꼴망태목동. 범벅타령, 님전화풀이 등 수많은힛트곡을 남겼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박복한 가수 이화자의 인생은 너무나 황량한것이었다.
어릴때부떠 가난한 결손가정에 식구들의 먹는 입을 덜기위해 모친이 술집에 돈받고 팔아버렸다는 말도 있다.(옛날엔 단지 먹여주기만 해도 부자 집으로 식모살이나 머슴살이 하는 경우가 50년대 까지도 있었다.)그러나  요염하고 농염한 그녀의 노래소리를 그리워하는  팬은 지금도 많다

-참조-김명환-이야기로 듣는 옛노래

1.꼿다운 이팔소년 울녀도 보앗스며
철업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드란다
연지와 분을발너 다듬은 얼골우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일흠이 원수다

2.점잔한 사람한테 귀염도 바덧스며
나 절믄 사람한테 사랑도 햇드란다
밤느즌 인력거에 취한 몸을 실어
손수건 적신적이 멧 번인고
일흠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3.빗나는 금강석도 탐내도 보앗스며
겁나는 세려앞헤 아양도 떨엇단다
호강도 시들하고 사랑도 시들해진
한떨기 짓발피는 낙화신세
마음마저 썩는것이 기생의 도리냐

(원본가사)
화류춘몽-1940년-조 명암 작사/김 해송 작곡/이 화자 노래.  



 

4 Comments
드넓은 광야 2006.11.18 18:22  
언뜻 듣다보면 목포의 눈물 이난영씨 음색과 비슷하군요
fabiano 2006.11.18 22:50  
인생이란 일장춘몽이요, 그 시절의 생활상이 눈에 떠오르는 듯 합니다. 60년대 끝 무렵에 니나노집 풍경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니....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화자,난영씨의 노래는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고....
닉네임 2015.09.06 09:03  
목단강편지는 친일가요인데 49년에 불렀을리가 있으려나
fabiano 2015.09.07 09:22  
日政下, 그 시대엔 일제의 압박과 강요로 누구던지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목단강 편지를 작사, 작곡한 조명암, 박시춘 제씨들이 어쩔 수 없이 친일적인 강요를 뿌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 박시춘씨는 자유롭게 국민들의 정서를 공감하며 작곡한 노래가 지금도 여전히 부르고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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