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야, 어서 나오너라
fabiano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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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22:23
<사진은 1960년대 춘궁기(보리고개)에 미국의 원조로 우유를 먹고 있는 당시 국민학생들.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보리야 어서 나오너라 - 4.19.는 가고 絶糧期만 남는가 - 다음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로서 진보적 연구 단체인 한국농업문제 연구회이사 등을 역임한 이창렬(1917∼1974)교수가 4.19. 혁명 1년 후인 1961년 4월 28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그는 박현채, 김진표(민주당 최고위원)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먹고 있는 옥수수 가루, 밥을 먹고 싶다 어떻게 산담. 아 아 ..... 어서 보리야 나오너라 " 위 시는 전남 부안군 행안면에 있는 당오국민학교 어린이가 작문 시간에 지은 동시다. 국회의원과 행정당국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냐며 태연자약할런지 모르나 " 어서 보리야 나오너라 " 하면서 말라 터진 대지위에 조아리며 빌고 있는 조약돌 같은 작은 주먹들이 보인다 한들 감상만 가지고서는 아무런 타개책도 나올리 만무하다. 우리에게도 잘 살아 볼 권리는 있을 것이다. 4.19. 혁명은 정치만의 혁명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제개혁의 의욕을 바탕으로 삼지않는 정치혁명이란 있어 본 일이 없다. 불란서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소련 및 중공의 혁명도 문제의 근본은 언제나 경제생활 개혁의 열정속에서 싹터서 자랐던 것이다. 4.19. 역시 " 못살겠다 갈아 보자"의 뿌리에는 잘 살아보기 위한 국민대중의 열망이 폭발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4.19. 가신지 1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지금 절량기(보리고개)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는 것이 웬 말이냐. 앞에 놓여진 "현실"은 농촌과 광산과 어촌과 도시를 막론하고 "바람과 비에 맡겨진 원시적인 생계" 밖에 없다고들 하니 웬 말인가 (동아일보 2월 하순 "현실" 보도 참조) 희망은 어장보다도 노름판에 달려있다는 것이 참말로 우리네의 "현실" 이라면 경제 개혁을 추진시켜 나갈 주인공의 의욕은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일까. 4.19.의 거족적 정열은 이제 한 낱 과거지사로 가버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4천년의 역사 및 인습과 더불어 이어 내려 온 "보리 고개"이며 춘궁뿐이던가. 독재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맨 주먹으로 실탄 난사에 항쟁하던 백성들이었지만 절량기에 직면한 가난과 굶주림에는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려서 좋단 말인가 절량농민의 수효를 보사부에서는 3월 16일에 209만명이라 집계한 일이 있었다. 호수로 34만 호에 이르고 있은 즉 한국 농민의 2할 가까운 숫자가 절량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셈이 된다. 장리쌀과 벌목은 날로 심해가고 있으며 못갈림 알갈림 내작 등의 이름을 가진 새로운 소작제도가 성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보리가 나올 때 까지 끼니를 이어가기 위해서 이농하는 무리들이 도시로 몰려든다. 도시엔들 안이한 생존의 길이 마련되어 있을리는 만무하다. 혁명의 4월을 맞이하면서 부터 전해진 현실이라고는 면방직 공장의 3할 조업단축, 제분 공장 35개중 27공장의 운휴, 제당 및 제지 공장들의 조업부진, 시멘트 공장의 휴업 등등이며 실업자 수는 233만명이라고 보도되었다. 국토건설사업은 아직도 제자리 걸음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기업가는 자금이 고갈되었다고 야단이고 환율과 관영요금의 인상이 있은 뒤로 물가는 폭등되고 그나마도 상품은 팔리지 않고 전력 사정은 언제 호전될 것인지 까마득하고 등등... 도대체 무엇이 나아졌다는 말인가. 국민생활은 점점 더 숨이 막히도록 궁핍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면 정권이 오늘 날 강행하고 있는 재정안정 정책과 가격기구의 현실화 정책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비난과 공격들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요새는 의례히 한숨을 짓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아도 우리들의 앞 길에는 암흑만이 있는 것 같다는 참패감에서 나오는 한숨 들이다. 어떻게 좀 해볼 수 없겠는가 하는 절망감이다. 누구를 믿고 살 것인가 하는 허무감도 또한 깊다. 4.19. 때의 희망이 컷던 만큼 작금의 허무와 절망은 더하다. 장면 내각도 바닥이 드러난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체될 만한 국민의 상징은 이미 찾아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마당에서 국민들의 남북통일을 부르짓는 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통일이 이루어 지면 어떻게 타개할 길이 우리 앞에 열리겠지 하는 기대들을 품고 있는 것이다. 통일이 이루어 지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뚜렷한 설계도를 가지고서 하는 말들이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통일만 되면 지금 보다는 나을테지 하는 기대 밑에서 그와 같은 희망이 국민들 속에 번져가고 있을 따름이다. 통일이 당장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들이 15년간 애써 키워 온 "자유"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위구심 보다도 국민 대중의 조급하고도 단순한 심리는 물에 빠진 사람이 검풀이라도 쥐어 잡으려는 듯 무책임한 도피처를 통일에 걸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한국 경제의 재건과 번영은 지금 바야흐로 누란의 위기에 임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또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해서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위급한 마당에서 우리는 굶어 죽기 전에 " 어서 보리야 나오너라 " 와 같은 말 그대로 기도드리며 비는 마음으로 무슨 대책을 모색해 보고 싶은 것이다. 한국 경제가 이대로 그냥 나가다가는 10년 뒤에 또는 20년 뒤에는 어떻게라도 경제 발전이 이룩되겠지 하는 최소한도의 서광마져 비쳐올 것 같지 않다. 다음은 1961년 4월 28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이창렬 교수의 기고문 원문이다. 1. 신문을 크릭하세요 → 원본보기를 크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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