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가적인 모습을 한 장군 1910년경의 위안스카이. 그는 청나라 군대에서 가장 권력 있는 장군이었다. 1908년 해임된 뒤에 침묵으로 항의하면 전통적인 시골 은둔자인양 처신했다. 짚으로 만든 망토를 걸치고 낚시하며 명상하는 모습은 중국 그림에서 오래되고 친숙한 모티프다. 혁명 이후에 쑨원이 중국의 첫번째 총통으로 추대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이를 1913년 의회에서 국민당을 내쫓고 심지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데 이용했다.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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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군벌 4인 청나라가 붕괴한 후 중국은 막강한 군벌들에 의해 분할되기 시작했다. 사진 왼쪽부터 리위안홍. 첫번째 혁명 당시 억지로 지휘자 역할을 맡았던 그는 우한의 세 지역을 지배했고,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1916년 총통이 되었다. 다음은 만주족 산적 출신인 장쭤린으로, 1920년대에 중국 북부를 호령하는 군벌이 되었다. 옌시산은 결국 강력한 반공산주의자가 되어 1940년대까지 산시성을 지배하면서 근대화에 앞장섰다. 그리고 기독교인 장군으로 알려진 펑위샹. 펑위샹의 조직능력은 공산주의자와 국민당원 양측에서 자기 편으로 데려가려고 구애하도록 만들었다.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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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시동안의 화합 1942년 4월 장제스와 쑹메이링. 중국에 새로 부임한 미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이 함께 미소 짓고 있다. 장제스는 사진을 찍기 위해 막 의치를 해 넣었다. 중국의 신임 미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스틸웰과 장제스의 화합은 중국이 ‘심술궂은 조’ 스틸웰의 지시를 무시하고 참패하면서 깨졌다. 스틸웰은 자신과 장제스가 “샌드위치 한 개만 갖고 구명보트에 올라탔으며 구조선은 멀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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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샘물 1950년대 말 마오쩌둥이 장시 성 루산 휴양지에서 당 지도자들의 가족과 함께 쉬고 있다. 마오쩌둥은 수영을 즐겼는데 이는 건강한 체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 속에서 죽은 동물이나 인분을 만날 때도 있었기 때문에 경호원과 주치의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통치 기간 동안 마오쩌둥을 묘사할 때 물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으며, 태양에서 끌어온 이미지로 대체된 것은 말기에 가서다.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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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1951년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사진. 마오쩌둥의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형제들과 첫째 부인은 내전 당시 처형당했고,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한 명은 한국전쟁 때 죽었으며, 둘째 아들은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대장정 중에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큰 딸 리민과 마오쩌둥이 리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린 소년은 마오쩌둥의 죽은 남동생의 아들 마오위안신이다.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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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샹강에서 수영을 하고 난 뒤라 발, 다리 가운이 진흙투성인 마오쩌둥이 고향인 후난 출신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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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돈에 지쳐 사진을 찍은 1972년 1월경 마오쩌둥은 자신이 선동한 혼란에 지쳐 극단적인 혁명 비전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수년간 ‘마오쩌둥의 가장 가까운 전우’로 불렸던 군 간부 린뱌오를 숙청했고, 비밀리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다음 달에 중국을 방문하도록 준비했다. 사진에서 마오쩌둥은 혁명 초창기 지지자였던 천이의 장례식에 참석해 미망인 장천의 손을 잡고 있다. 마오쩌둥은 수염이 자라게 내버려두었는데, 매우 의기소침한 상태에서만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2월말 닉슨이 방문할 때쯤에는 다시 깨끗하게 면도했다.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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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생존자 여든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정정하고 활기찬 덩샤오핑이 인민공화국 수립 35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후에 지도자로 등극함으로서 용수철과도 같은 회복력에 대한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 때 당직에서 쫓겨났고, 1976년 봄 험악한 정세 속에 또다시 추방되었던 덩샤오핑이 세번째 복귀에 성공한 것은 인민해방군과 당 고위급 관료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또한 덩샤오핑은 흠잡을 데 없는 혁명 경력이 있었다. 1904년에 태어나 1920년대 초 프랑스에 머물 당시 노동-연구모임의 젊은 학생으로서 공산당에 가입했다. 장시 소비에트와 대장정을 통해 투쟁을 전개했고, 중국 북부에 공산 게릴라 기지를 세우는데 일조했다. 이 기지는 내전에서 1949년 최후의 승리를 이끄는 발판이 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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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완의 장제스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함께 국민당 망명 정부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이 여전히 중국인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한 뒤 긴장완화를 위한 시험적인 예비 교섭이 이루어졌고, 1980년대 초가 되어서야 드디어 타이완 출신 중국인이 처음으로 본토에 돌아가 30년 넘게 떨어져 지낸 친척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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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심’ 1980년대 초 덩샤오핑이 마오쩌둥 집권기의 두드러진 비리 일부를 바로잡으려 하면서 사용한 구절이다. 1981년 1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문화대혁명 시절 수십만 명을 죽이고 박해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거쳐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장칭을 포함해 4인방은 마오쩌둥이 죽은 지 한 달 뒤인 1976년 10월에 체포되었다. 사실 장칭은 2년의 형 집행 유예를 승인받았고, 뉘우치는 모습이 보이면 사형선고를 종신형으로 바꾸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칭은 참수당하는 편이 더 영예로울거라고 분명히 말하면서 “천안문 광장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형할 것을 선고하라”고 법정에 맞섰다. 장친은 여전히 반항적이어서 독방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가택연금으로 바뀌었고, 처형되지는 않았다. 1993년 자살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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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20세기를 사진으로 본다.
<인터넷한겨레>는 출판사 ‘북폴리오’가 2006년 말 펴낸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1-중국의 세기>(지은이 조너선 스펜스)에 게재된 사진들을 북폴리오의 양해와 도움 아래 온라인에 연재한다.
중국의 20세기는 격변과 혼돈의 시기였다. 멸망해 가는 거대한 제국의 마지막 지배자들과 이들을 타도하려는 일군의 혁명주의자들이 대륙을 무대로 몸부림쳤다.
이 책은 중국대륙의 격변기에 새로운 질서를 이용했던 군벌과 자본가, 내전의 혼란과 일본의 잔인한 침략전쟁 및 점령, 대장정과 대기근, 홍군의 승리, 문화대혁명의 고통과 무자비함, 4인방의 파괴행위와 몰락, 천안문 광장의 비극 등을 생생하게 담았다. 이 책에 소개된 사진들은 대부분 그동안 출판된 적이 없는 자료들로, 개인 소장품과 최근 중국, 대만, 그 외 다른 곳에 문을 연 사료보관소, 저명한 현대 중국 보도사진작가에게서 입수한 사진들로 중국의 감춰진 얼굴에 생생함을 부여한다.
<인터넷한겨레>는 생생한 중국의 20세기 사진을 모두 7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제국의 최후 2. 혁명과 전쟁 3. 권력의 핵심 4. 근대화 5. 대약진, 대기근 6. 문화대혁명 7. 새로운 시대 등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