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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 Singlaub 중위(2차 세계대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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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 Singlaub 중위


1944년 8월 11일, 적지 종심에 연합군 특수작전 요원을 침투시키는 "제드버러(Jedburgh)" 작전을 위해 

낙하산 강하작전을 준비하던 중 촬영된 존 K. 싱글러브(John Kirk Singlaub, 1921~2022) 중위의 모습.

 

가슴에는 공정강하용으로 제작된 .3 구경 M1-A1 개머리판 접이식 카빈을 매고 있다. 

그는 작전 투입에 앞서 적에게 잡힐 경우를 대비해 청산가리가 든 캡슐이 지급되자 이를 받지 않고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전 적에게 잡힐 계획이 없거든요."


싱글러브는 2차 세계대전,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참전했으며, 

두 개의 우수근무훈장(Distinguished Service Medal), 은성훈장(Silver Star), 

퍼플하트(Purple Heart: 전상장)를 포함한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는 초창기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필드 멤버로 참여해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 등지에서 침투활동을 벌였으며, 훗날 CIA가 창설됐을 때도 초창기 멤버로 참여했다.


"제드버러" 작전은 영국 특수작전집행국(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 미 전략정보국(OSS), 

자유프랑스 중앙정보작전국(CBI), 망명 네덜란드 및 벨기에 군이 공동으로 실시한 비밀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독일 치하의 프랑스에 연합군 비밀 요원을 낙하산으로 비밀리에 침투 시킨 뒤 

현지 레지스탕스와 조인하여 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지역에서 광범위한 

적 사보타주 및 게릴라 전을 실시하는 작전이었다. 


: 특수전 및 정보 분야의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사실 한국에서는 훗날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자 이에 대놓고 반기를 들다가 해임된 인물로 기억된다. 


2차대전 때에는 훗날 CIA 국장을 역임한 윌리엄 케이시(William J. Casey, 1913~1987)와 함께 팀을 이루어 

현장 요원으로 활약하면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함께 유럽 내부에서 독일을 괴롭혔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한 뒤에는 태평양으로 이동해 중국 하이난(海南) 섬에 

수용된 연합군 포로들을 탈출시키는 등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6.25전쟁 때에는 중령 계급을 달고 한국에 파견됐다. 

최초에는 CIA 한국 부 거점장으로 파견되어 왔지만 전황을 지켜보던 

그는 보직을 다시 군으로 되돌려 보병 대대장으로 활약했다. 


그가 받은 최고 수준의 훈장인 은성훈장도 이 때 받은 것이다. 

6.25 휴전 후 다시 CIA로 복귀한 그는 만주, 베트남, 라오스, 니카라과,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누비며 

자유세계의 승리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지미 카터(Jimmy Earl Carter, 1924~) 후보가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됐을 당시 주한미군사령부(USFK: United State Forces-Korea) 참모장으로 근무 중이었는데, 

카터가 시작부터 한국에서 약 4만 명 수준(전투병력 15,000명)이던 

주한미군사령부의 철군을 추진하자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는 1977년 3월에 대놓고 공개적으로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군 계획을 비난했다.

카터 역시 싱글러브 장군의 반발에 당황했는데, 우선 그가 철군 대상인 

주한미군사 소속 지휘부 장성이라는 점도 부담이었고, 

행정부가 처음 밀어붙인 정책에 현역 장성이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것도 묵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특히 카터는 당시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71%에 달했으므로 이를 업고 싱글러브를 3월 29일자로 해임해버렸다.

 

하지만 해임 직후 갑자기 국정 지지율이 67%로 내려 앉았는데, 

이것이 행정부-군의 대결로 보이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이자 카터는 뒤늦게 그를 달래보기 시작했다.


우선 카터는 싱글러브 해임의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당시 기준으로 미 육군 최대 규모의 사령부인 

육군 전력사령부(US FORCECOM: 911 테러 후 미 북부사령부에 흡수) 참모장으로 다시 보직 시켰고, 

카터는 그와 따로 면담을 하면서 모든 "오해"가 해결됐다는 듯한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싱글러브는 그 후에도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분명 전력 격차를 이용해 북한이 남한을 재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1978년 4월 조지아 공대에서 ROTC 대상 강연을 하면서 카터의 국방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심지어 그는 이 날 중성자탄 개발을 중단하고 파나마 운하 반환을 결정한 

카터의 국방 안보 정책을 ROTC 후보생들 앞에서 비판했으며, 

5월 19일에는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뼈아프게 공격했다. 


심지어 인터뷰 후에는 워싱턴포스트와 대척점에 있던 진보지인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까지 가세해 싱글러브 장군의 군 경력을 조명하며 그를 지원했다.


결국 그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본 카터는 그를 다시 전력사 참모장에서 보직 해임 시키고 

미 국방부로 대기 발령 조치 했으며, 미 육군은 그에게 자진 전역을 제안했다. 


결국 싱글러브는 이를 받아들여 1978년 6월 1일자로 군 생활을 접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하지만 카터 행정부는 싱글러브의 항명을 시작으로 주한미군 철군의 탄력을 잃었고, 

이 시점부터 자유진영과 공산권의 충돌이 격화됐으므로 

여론마저 카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1978년에는 상하 양원의 양당 소속 의원들이 모두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보류를 요구하기 시작하자 

카터는 결국 "철군"에서 "감군"으로 목표를 바꿨고, 얼마 뒤인 1979년 1월 20일자로 

대통령 검토각서(PRM: 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 45호를 통해 

"주한미군 철군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가 끝날 때까지 철군 문제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중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공산권과의 데탕트(detente) 분위기가 깨졌고, 

이듬해 대선에서는 카터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에게 패했기 때문에 

주한미군 철군 문제는 결국 흐지부지한 상태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싱글러브 장군은 주한미군 철군 문제를 언급한 뒤로 카터 행정부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당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그는 전역 후 이 사건으로 별 둘로 예편하게 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냐는 질문을 받자 

“내 별 몇 개와 한국인 수백 만 명의 목숨을 바꾼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2021년 7월에 100세가 됐으며, 2022년 1월 29일에 타계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테네시 주 프랭클린에 거주했으며, 

공산주의 피해자 기념재단 이사, 영국 특수전 클럽 명예 부회장, 

그리고 비영리단체인 "아메리카 퓨처(America's Future, Inc.)"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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