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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길버트 著, 안재철 譯 <기적의 배>, 흥남철수비화 전격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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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길버트 著, 안재철 譯 <기적의 배>, 흥남철수비화 전격 공개

[단독] 1.4만명 구한 영웅 47인, 기적의 항해일지

'국제시장' 등장한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 목숨 건 나흘간의 항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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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진행된 흥남철수작전 당시 연합군과 북한 피란민들의 이동 경로. ⓒ 자료 제공 = 월드피스자유연합


"'기적의 배'가 없었다면 <국제시장> 덕수도 없었다"

영화 <국제시장>은 흥남부두에 모인 수만명의 피란민들이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에 타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부둣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국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제작진은 동생의 손을 답고 부둣가로 달려가는 어린 덕수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에게 마치 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촬영 당시 수백명의 보조출연자들이 동원됐지만 실제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의 규모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에 제작진은 CG작업으로 수많은 인파를 덧입혀서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들던 흥남 부둣가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한반도 북동부 흥남항에서 진행된 대규모 탈북 작전을 일컫는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10만명 이상의 유엔군과 35만톤 이상의 군수물자가 성공적인 철수를 했을 뿐 아니라, 10만명에 가까운 북한 피란민까지 무사히 생명을 건진 것으로 전해졌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에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연합군을 밀어붙인 중공군은 순식간에 평양을 재탈환하고 수도인 서울까지 재점령하는 가공할만한 전투력을 과시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군과 연합군은 흥남에서 철수한 뒤 1월 4일엔 서울, 1월 7일엔 수원까지 공산 진영에 내주는 치욕을 겪었다.

이른바 [1.4후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단기적으로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연합군이 이남으로 패퇴하는 양상으로 변했으나, 흥남에서의 성공적인 철수로 미 10군단이 병력과 화력을 온전하게 보존함으로써 훗날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주력부대가 되는 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영화 국제시장은 이렇듯 전쟁의 양상을 송두리째 바꾼 [흥남 철수]와 [1.4후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흥남 철수 작전]이 실패해 유엔군과 피란민 10만명이 도륙 당하고 각종 물자 35만톤이 파괴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951년 1월부터 전개된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나 [제2차 서울수복]을 가져온 [리퍼작전](Operation Ripper)은 역사책에 등장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또한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한 장기려 박사나 화가 이중섭, 정치인 문재인은 짧은 생을 마감했거나 아니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기려 박사와 이중섭 화백은 1950년 12월 각각 평양과 원산에서 남하, 부산에서 터전을 닦은 이북 출신 인사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다른 결단]을 내렸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면,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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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례미사에서 운명이 바뀌다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가 처음 <기적의 배>(Ship of Miracle)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은 2001년 10월 14일 미국 뉴저지주의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에서 있었던 마리너스(Marinus) 수사의 장례 미사에서였다. 당시 뉴저지 한인 성당에서 성가대장을 맡고 있던 부인과 함께 미사에 참석한 안 대표는 그 곳에서 우연히 마리너스 수사의 과거 행적을 알게 됐다.

마리너스 수사의 본명은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50년 12월 21~23일 흥남부두에서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로 향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가 바로 이날 장례 미사의 주인공이었다.

이전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라루 선장은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뉴저지주 뉴튼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라루 선장은 마리너스 수사(修士)라는 수도명을 받고 46년간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983년 미국으로 건너와 뉴저지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안 대표에게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한국 피란민들을 구했던 미국 선원들의 일화는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연한 기회에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감동적인 사연을 접한 안 대표는 이때부터 전혀 다른 인생을 걷게 된다.

그 즉시 이들의 인도주의적인 업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안 대표는 평소 관심에도 없던 한국전쟁을 공부하고 각종 전사(戰史)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구조 일화를 기록한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이를 가져다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도 맡았다. 또 안 대표는 자신이 직접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을 다룬 <생명의 항해>라는 책도 펴냈다.

그는 <월드피스자유연합>이란 사단법인을 세운 뒤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별도의 사진전도 기획했다. 미국 국립자료보관청과 참전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 당시의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대량 확보한 안 대표는 2005년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청계광장·육군훈련소 등지에서 <생명의 항해 - 6.25 사진전>을 순회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 대표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기네스북에 올리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 피란민 1만 4,000명을 구출한 공을 인정받아 2004년 9월 21일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안 대표는 수년 전 한국전쟁을 알리는 행사에 매진하는 이유를 묻는 뉴데일리 취재진에게 "단순히 한국전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며 "폐허를 딛고 이룬 오늘의 번영을 이어가고 이를 더욱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키우자는 게 제일 큰 목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과거를 잊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민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은 평범한 이민자로 살고 있던 안 대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고, 그의 발걸음을 자꾸만 고국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10년이란 세월히 흘렀다.

안 대표가 뿌린 씨앗들은 이제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다.

그가 발품을 모아 전시한 사진들과, 번역·집필한 각종 책자들은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영웅들의 미담]을 세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반세기 만에 [흥남철수작전]이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고,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현봉학 박사와 알몬드(Edward Almond) 장군,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등의 업적이 재조명 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순전히 안 대표의 활약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대표는 <월드피스자유연합> 홈페이지에 남긴 글에서 "흥남철수작전은 생명 구출을 향한 [위대한 도전]이었다"며 "이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북한 민간인은 적국의 국민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구출작전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십만 병력과 거의 같은 수의 피란민이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철수 현장의 모든 지휘관과 병사들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민간인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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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 ⓒ 연합뉴스
 

 
#2. '미국의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자!

<워싱턴 포스트> 기자 빌 길버트(Bill Gilbert)는 1985년 5월 19일 의미있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은 미국 정가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5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희생된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되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위한 기념비를 건립해야 한다.



이 칼럼에 자극을 받은 스탠 패리스 하원의원(버지니아주)과 윌리엄 암스트롱 상원의원(콜로라도주)은 한국전쟁 중 군에

복무한 570만명을 위한 기념비를 수도인 워싱턴에 세우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로부터 10년 뒤, 워싱턴 시내 한복판에 16명의 참전용사상과 사망·실종자 명단을 새긴 벽면 등 한국전기념물이 세워졌다.

이렇듯 미국인들에게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상기시키는 일에 앞장 섰던 빌 길버트 기자는 2000년 6월 역사적인 책을 썼다. 바로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의 인생을 바꿔놓은 에세이 <기적의 배>(Ship of Miracle)를 출간하게 된 것.

빌 길버트 기자는 서문에서 "미국인들이 '미국의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도록 돕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역사를 위해 이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흥남에서 싸운 미국 군대에 경의를 표하는 과정에서, 저자로서 내가 희망한 것은 미국인들이 [미국의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었다.


10여년 전 신문기사를 통해 "전쟁이란 역사를 잊어선 안된다"며 전국민적 각성을 촉구했던 빌 길버트 기자는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60대 이상의 미국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주목, 자신이 알고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 승무원들의 영웅적 활약상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6.25전쟁이 한창일 당시 미 공군에서 복무했던 빌 길버트는 1950년 크리스마스에 10만명의 미군과 9만여명의 피란민이 항구도시 흥남에서 철수, 북한을 탈출한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 군인들이 용감했었다면, 미국 군인들과 거의 같은 수의 북한 피란민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다투었던 승무원들의 용기도 그에 못지 않았다. <기적의 배>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용감한 구조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1950년 12월 중순 미 육군과 해병대의 장진호 포위 돌파, 그리고 함정들이 대기하고 있던 흥남으로 향한 그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책들이 집필됐으나, 그와 동시에 전개되고 있던 북한 피란민의 구출 이야기,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눈물겨운 사투에 대해선 거의 소개된 적이 없었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극적인 상황이 타전될 당시, 대부분 미국인들의 관심은 북한 피란민과 그들에게 닥친 생사의 위험보다는 자국 병사들의 안전에 집중돼 있었다.

물론 북한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승무원들은 50~60년대에 미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고 이같은 이야기는 몇 차례 신문과 잡지에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들이 소개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몇십년 전의 일이었다. 사실 흥남철수 직후에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이야기를 알았던 미국인들은 별로 없었으며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시점에 당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빌 길버트는 현충일만 되면 각종 매스컴에서 베트남 참전용사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현실을 못마땅해 했다.

 

기자들과 뉴스 앵커들은 현충일이나 재향군인의 날 기념식을 보도하면서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참전 용사들에겐 경의를 표하는 찬사와 영상 자료를 내보내지만,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복무했던 이들, 특히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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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통탄했던 미국인들의 희박한 역사 의식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연상케 한다. 전쟁의 당사국으로서 매년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고는 있지만, 나라를 지킨 순국선열을 진심으로 기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누군가 과거 6.25전쟁이나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면, 고리타분하다며 손사래 치기 일쑤다. 


역사 배우기를 꺼려하는 탓에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자꾸만 단절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대로 된 역사를 알지 못하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능력도 점차 퇴화되는 모습이다. 젊은이들이 팩션을 자꾸만 논픽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역사 단절]이 낳은 병폐현상 중 하나다.

뚜렷한 역사인식이 없는 요즘 세대에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의 역사를 반영한 영화 <국제시장>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절실했고, 그만큼 위험요소도 많았다. 사실 관객이 외면해 버리면 그 뿐이었다. 영화의 메시지가 어떠하건간에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진다면 그 속에 담긴 진실도 함께 수장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제시장>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역사를 전혀 모르던 이들에게도 감동의 파고를 일으켰다.

서로 생면부지인 안재철 대표와 빌 길버트가 동일하게 [흥남철수작전]에 주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간 생명의 존귀함을 다룬 [휴머니즘]이야말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더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 어디있을까?

이들은 한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젊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차갑게 식어버린 현대인의 감성을 일깨우고자 했다. 하지만 <기적의 배>가 갓 출판됐을 때만 해도 이같은 바람은 한낱 허황된 꿈으로 비쳐졌다. 흥남철수와 한국전쟁에 대한 무관심은 그 이후로도 쭉 계속됐다.

그런데 이들이 뿌린 씨앗은 한참만에 <국제시장>이란 영화로 발아(發芽)됐다. 흥남 부두항에서 생명을 건진 한 소년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성장하는 휴먼스토리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울리고 말았다. [생명의 항해]에서 피어난 인류애가 시간과 장소를 돌고 돌아, 세대간의 높은 벽을 허무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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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나긴 피란민 행렬,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강풍이 몰아치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엄습했다. 해안으로부터 적의 포탄이 배를 향해 아슬아슬하게 날아오고, 미 전함

미주리호, 구축함 4척, 중순양함 2척이 응사하는 포탄이 해안 쪽으로 날아가는 상황 속에서 [운명]은 37살 된 필라델피아 출신의

상선 선장을 부르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개월째인 1950년 크리스마스 주간에 적진 217킬로미터 지점인 흥남항에서 선장 레너드 라루는 건조된지

5년 된 1만톤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 갑판에 서 있었다.

저는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폈는데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를 나르거나 들거나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그들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약 10만명의 겁에 질린 북한 피란민, 죄없는 희생자들인 노인, 여성, 아이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민간인만 만나면 죽이려고 위협하는 중공군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중공군들은 민간인들이 미군과 연합군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백, 심지어 수천 가족의 비극이 부둣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29살 김정희씨는 두 살배기 막내 딸 원숙을 등에 업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한 손으로 다섯살배기 아들 두혁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열 살배기 큰 딸을 안고 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흥남에서 남쪽으로 96킬로미터 떨어진 원산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이아몬드와 다른 귀금속을 파는 보석상을 운영했다. 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공산체제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그들은 원산을 탈출해 남한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두 부부는 남쪽에서 가족의 자유와 안전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땅에 눈이 쌓여 있는 영하의 기온 속에서도 기꺼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어요. 걷는 일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았어요.
날이 아주 흐리고 지독하게 추웠지요.


김씨는 걸어가면서 안전과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지나쳤다. 도로에는 흥남을 향해 걸어가는 피란민들이 많았다. 그들의 피난은 공산당의 철권통치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이는 "북한사람들이 발로 투표하고 있었다"는 흥남 전투 참전용사들의 진술이 설득력이 있음을 말해줬다.

흥남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전투기에 의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당했다. 그녀는 그 비행기들이 미국기였는지 중공기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도로변에 엎드려야 했다. 전투기들이 넓게 퍼져 있는 피란민을 공중에서 내리 덮칠 때 사람들은 저마다 기총사격에 희생당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었다. 때문에 부모들은 거의 자식들과 헤어졌다.

흥남에 도착한 후 그들은 흥남 부두가 아수라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서로 밀치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했다. 군인들은 병력 수송을 위한 배에 피란민들이 승선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간인과 군인을 분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부대의 승선이 완료된 후 아직 해변에 남아 있던 다른 군인들은(미 육군 보명 제 3사단 병사들) 피란민을 한반도의 남쪽 끝 항구 도시인 부산으로 수송하는 다른 함정들에 승선시키는 작업을 도왔다.

피란민의 행렬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고 또 시시각각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거대한 인파가 여기저기 형성되고 있을 때 김씨의 남편 이만식씨는 식구들이 먹을 양식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딸 군자를 데리고 갔다. 그는 아내에게 "여기서 기다려요. 곧 돌아오겠소"라고 말했다. 남편이 떠난 후 계속 늘어나는 인파와 미국 배들이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필사적이 됐다. 피란민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배인지, 또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거기에 타면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른 채, 앞 사람들에게 서둘러 배에 승선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그것이 배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들에게 배는 어떤 종류이든 [생존의 희망]이었다.

김씨는 주위의 군중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앞으로 계속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남편이 말한 대로 바로 그 자리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방향으로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 찾을 수 없을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원산에서 온 그녀의 이웃들까지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부두의 모든 사람들이 배를 타려는 의지가 강해지면서 인파의 힘은 젊은 엄마와 두 아이를 미군 상륙정(LST)을 향해 밀어 넣었다. 인파 속의 어떤 이가 김씨에게 말했다.


자, 갑시다. 이것이 마지막 배일지도 몰라요.

1950년 흥남 부두의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그 상황이 베트남 전쟁 말엽인 1975년, 미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를 완료하고 있을 때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에 몰려들어 지붕에서 미군 헬기에 타려고 안간힘을 쓰던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흥남에서 김씨와 두 아이들은 말 그대로 인파에 떠밀려 미군 상륙정에 승선했다. 그녀는 남편과 큰 딸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자신이 남은 여생을 그들을 애타게 찾으며 보내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팔십 줄에 들어선 지금도 김정희씨는 아직도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다른 피란민들도 비슷한 시련을 겪었다. 애슐리 헐지 주니어는 흥남철수 이후 넉 달이 채 못된 1951년 4월 14일자 <이브닝 포스트>지에 피란민 중 몇 사람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한 남자는 자신의 바이올린만을 가져왔다. 한 여인은 재봉틀을 머리에 인 채 어렵게 배의 현문을 들어가고 있었다. 한 가족은 전체가 합심해 피아노를 실으려 했지만 사람들이 타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곧 갑판 아래의 모든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일부 사람들은 다리를 구부린 채 서로서로 끼어 앉았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러시아워의 버스나 지하철 승객들처럼 서 있어야 했다. 3살 된 여자 아이 하나는 살아 있는 닭을 팔에 안고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상급선원들과 승무원들은 근처의 해안에서 이 광경을 충격적인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193척의 해군 전함, 상선, 그리고 흥남한을 가득 메우고 있는 소형 어선들 중에서 가장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운명이 자신들의 어깨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요란한 전쟁 상황에서 체험하게 되는 절망과 공포로 가득한 이 광경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극적인 해상 구조작전의 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던커크 해안에서 35만명의 연합군이 진격해오는 나치로부터 탈출한 작전에 비견될 만한 기적같은 성과였다.

피란민들을 죽이거나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12만명의 북한군과 중공군이 6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미군이 진을 치고 있는 방어선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피란민들 앞에는 부산에서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가는 유일한 희망의 길인 거대한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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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세가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로이 E. 애플먼 중장은 1990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함정을 벗어나 : 1950년, 동북부 북한에서의 미 육군 제 10군단>에서

피난민들이 10만명의 미군과 같이 후퇴하던 모습을 "놀라운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피란민들은 미군의 안전 뿐만 아니라 피란민들 자신의 안전에도 위협이 됐다. 적군은 첩보를 위해 혹은 기습 공격을 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간인들 사이로 숨어들었기 때문에 피란민들은 언제든지 심각한 위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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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Meigs Haig) 장군은 이 사건을 [철수]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철수가 아무리 질서정연하게 이뤄졌다 해도 이것은 분명 후퇴였고 병사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남기고 온 시민들도 그렇게 느꼈다"고 기술했다.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헤이그는 경연락기 L-19를 타고 혼란 속의 광경 위를 비행했다. 알몬드(Edward Almond)

장군도 다른 L-19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육지에 있었건 혹은 항구의 배에 있었던 다른 이들이 나중에 묘사한 광경을 그들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헤이그는 나중에 이렇게 표현했다.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를 든 많은 피란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서로 뒤섞여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모두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는 마지막 순간에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그때 우리는 소형 비행기로 흥남항 상공을 비행하면서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배를 향해 수만명의
피란민들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며 걸어가는 것을 봤다.

알몬드 장군과 그의 젊은 보좌관 헤이그는 항구의 상공을 선회하면서 무전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분투를 보면서 알몬드 장군은 10월에 대위로 승진한 헤이그에게 "이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순 없네. 반드시 모두 구출해야 하네"라고 말했다.

군단 내의 수륙양용 작전 전문가 중 한 사람인 에드워드 포니(Edward Foney) 해병 대령은 부두 근처의 창고에 마련된 본부에서 흥남항구의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알몬드 장군의 부참모장으로서 군대를 배에 승선시키는 일, 피란민들과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무엇이든 태워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일, 그리고 적에게 소용이 될 수 있는 보급품이나 장비를 이동시키거나 파괴하는 일 등을 포함한 철수작전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군단의 병참장교인 로우니(Edward L. Rowny) 대령과 긴밀히 협력해서 일했다.

헤이그포니 대령, 로우니 대령과 교신을 하면서 철수작전에 필요한 충분한 선박을 흥남으로 보내기로 한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했다.

헤이그는 비록 젊은 장교였지만 상급 장교들에게 필요한 수의 배를 요청할 때 그들이 이 일에 대한 알몬드 장군의 [강한 의지]를 이해하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 헤이그는 장군의 지시를 전달했고, 포니 대령은 10만명의 피란민들을 자유의 땅으로 수송할 배를 확보했다.

그러나 많은 피란민들의 탈출이 자동적으로, 아무런 논쟁없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작전을 위해 미군들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미국 본토 관리들의 막후설전이 벌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작전이 진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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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봉학 박사는 현 마리안과의 공저 <크리스마스 화물 : 민간인이 바라본 흥남철수>에서 이 논쟁에 대해 기록했다. 당시 알몬드 장군의 민간 문제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는 훗날 필라델피아의 토마스 제퍼슨 대학 병원의

병리 및 혈액학 교수로 일했다.

현봉학 박사는 포니 대령에게 알몬드 장군을 설득해 북한 피란민들을 포기하지 말고

흥남에서 구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사정을 전해 들은 포니 대령은 알몬드 장군에게 부탁해 보겠노라고 말한 뒤 현 박사의 얼굴에 비친

걱정스런 표정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한번 해 봅시다. 나폴레옹의 사전엔 불가능이란 말은 없었다지요?

1950년 11월 30일, 포니 대령과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 장군을 만났다.

북한 피란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시간을 더 들이고, 결과적으로 미군의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일에 강한 반대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현 박사는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장군님, 이들은 진심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5년 동안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장군님, 이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포니 대령이 덧붙여 말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우리를 도왔습니다.

현 박사는 계속해서 "유엔군을 도와 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군대의 편의를 이유로 그들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들의 말을 경청한 알몬드 장군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 군대가 탈출할 수 있을지 조차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적의 스파이가 수천의 피란민 속으로 침투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회의가 끝난 후 알몬드 장군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에 건의해보겠다는 선까지만 동의했다.

현 박사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는 알몬드 장군을 여러 번 더 만나 피란민들의 철수 문제를 건의했다. 포니 대령과 역사분과장인 제임스 쇼트 대위도 현 박사를 거들었다.

이러한 현 박사 일행의 노력은 12월 9일 미군이 "한국인 군속 민간인들을 탈출시킬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를 두고 현 박사는 "저는 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필사적이기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4일 후, 현 박사는 메리뇰 선교회에서 한국에 파견돼 제10군단의 군종 신부로 근무하는 패트릭 클리어리 신부를 만났다. 클리어리 신부와 현 박사는 한 남한 사람의 도움으로 군사 장비를 싣고 갈 2척의 상륙정을 구했으며, 그 덕택으로 다른 배들은 4천명의 피란민들을 싣고 나갈 수 있었다. 그 때가 12월 중순이었다. 흥남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함흥에서의 철수 시한은 다음 날 오전 6시로 정해졌다. 중공군은 이제 함흥 앞까지 와 있었다.

12월 15일 오후 포니 대령과 현 박사가 참석한 회의에서 알몬드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4천~5천명의 피란민을 함흥에서 흥남으로 기차로 운송하겠습니다.

현 박사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장로교회를 방문했을 때 50명의 신자들이 지하실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이날 밤이 그들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공군은 아침에 들이닥칠 것으로
예상됐다. 그가 신자들에게 미군들이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킬 것이라고 말하자, 이들 중 한 사람이 "모세가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머지 신자들은 그 외침을 받아 가락에 맞춰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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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승무원 외 12명의 승객만 승선 가능해"

새벽 2시에 출발한 열차는 새벽 5시경 흥남항에 도착했다.

열차에 탈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은 얼어붙은 논과 산길을 걸어서 흥남으로 갔다.

함흥에서의 철수가 끝난 상황에서, 다음 문제는 흥남에 도착해 며칠째 배를 기다리고 있는 10만명의 피란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버려진 학교 건물이나 난방이 안된 개인주택에 수용됐다.

운이 덜 좋은 사람들은 난방도, 물도, 주방시설도 없는 학교 운동장이나 회합 장소 같은 노천에서 기다려야 했다.

죽는 사람도 있었고, 출산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대를 탈출시키기 위한 배들은 항구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한 번에 7척의 배를 수용할 수 있는 항구에 11척의 배가 닻을 내리고 있었다. 현 박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군대의 탈출은 밤낮으로 계속됐고 승무원들은 손상된 항구 시설과 고장난 예인선을 끊임없이 보수했습니다. 기온은 영하 10도로 떨어졌습니다. 총성은 점점 가까워졌지만 피란민들을 싣고 갈 배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12월 17일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도착했다. 남한 해군으로부터 3척의 상륙정이 흥남에 도착했고, 뒤이어 6척의 수송선이 일본으로부터 도착했다. 민간인들의 탈출은 12월 19일부터 시작됐다. 상륙정들은 공식 승선 인원보다 훨씬 더 많은 수를 태웠다. 1천명의 인원을 태우도록 건조된 배들에 5천명 이상을 태웠다.

현 박사는 12월 21일 <써전트 앤드루 밀러> 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밤새 갑판에서 피란민 철수가 계속되는 것을 지켜 봤다. 일부 피란민들은 승선할 공산이 없을까 두려워 아우성을 쳤다. 그들의 두려움은 적이 가까워지면서 높아지는 포성에 의해 더 커졌다. "해군의 야간 포격은 수평선에 떨어지는 별똥별 같았다"고 현 박사는 말했다.

현 박사가 탄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출항하기 하루 전날인 12월 22일 아침 흥남 항구를 떠났다. 훗날 포니 대령으로부터 10만명의 북한 피란민이 흥남항에서 탈출했다는 말을 듣고 현 박사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저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10군단은 제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도와 줬습니다.

포니 대령은 흥남철수 후 곧장 미국으로 돌아갔고, 현 박사는 그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포니 대령은 답장에 이렇게 썼다.


그쪽 지방에서만 10만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당신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감사의 선물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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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었더라면 구조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근 도시인 원산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서, 남쪽으로의 어떠한 탈출도 봉쇄됐고 민간인들을 위한 비행기는 전혀 없었다. 바다만이 흥남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여러 척의 배가 비란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들 중 하나가 바로 미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였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가을 내내 인천, 부산, 일본을 왕복했고, 52갤런짜리 드럼통에 담긴 10만톤의 제트 연료를 도쿄에서 흥남 부근에 있는 연포공항의 해병대 항공단까지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승무원들은 동해의 주요항인 흥남에 도착했을 때 적의 엄청난 공세 때문에 연료를 하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해병대는 탈출 중이었다.

그들은 부산으로 가서 연료를 하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산에서 연료의 하역을 마치기도 전에 라루 선장은 철수 작전을 돕기 위해서 즉시 흥남으로 돌아오라는 긴급 명령을 받았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2월 20일 저녁 흥남에 도착했다.

미군은 철수를 위해 여전히 흥남에서 대기 중이었으므로 구할 수 있는 배란 배는 모두 필요로 했다. 또한 거의 10만명에 달하는 북한 피란민들도 있었다. 그들은 적국인 북한의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이었지만 모두 고귀한 생명들이었다. 만약 구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흥남의 외항으로 들어온 후 소해정의 안내로 해안에서 가까운 지점까지 인도됐다. 해변에서는 피란민들이 자신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상급 선원인 러니(J. Robert Lunney)는 소해정이 불빛 신호를 이용해 어떤 화물이 실려 있는지를 물어왔던 것을 기억했다. 모든 미국 배들이 무선통신을 꺼놓은 상화이었기 때문에 금속 조각들을 이용해 신호를 깜빡이는 통신방법은 필수적이었다. 소련의 잠수함이 바다 밑에서 잠행 중이었다.

러니는 "제트 연료를 운반 중이라는 신호를 보냈을 때 그들의 충격적인 표정을 거의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입항하고 있던 곳은 오늘날에도 해전 역사상 가장 많은 해저 기뢰가 매설돼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소해정은 필수적이었다.

러니는 이렇게 설명했다.


자석 기뢰, 미끼 기뢰, 그리고 계산기 기뢰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기뢰가 매설돼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계산기 기뢰를 스마트 기뢰라 부르죠. 압력 기뢰도 있었는데, 기것은 기뢰 위를 지나가는 배의 크기에 반응해 터집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해변에 닻을 내렸을 때 미군 대령 몇명이 승선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미 육군 제10군단의 존 H. 차일즈 대령이었는데, 알몬드 장군 휘하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대령들과 선장 라루, 러니를 포함한 몇몇 책임자들은 해군의 은어로 병동이라고 불리는 [살롱]에서 만났다.

차일즈 대령은 라루 선장에게 그의 배가 항구에 있는 마지막 배들 중 하나라고 말한 후, 해변의 피란민들 중 몇 명이나 태우고 부산으로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러니라루 선장의 대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라루 선장님에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우리가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흥남철수가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해병 제1사단과 육군 보병 제7사단이 이미 철수했으며 육군 보병 제3사단이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적군이 포위망을 빠르게 좁혀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더군요. 수천명의 피란민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부두에 몰려 있었으므로 우리는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령들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상급 선원들과 승무원들 외에 12명의 승객만을 태울 수 있도록 설비돼 있으므로 라루 선장에게 피란민들을 태우라고 명령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피란민들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그러나 당신이 자원해 배를 가지고 들어가 해변의 피란민 중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 선원들과 협의해서 결정을 내려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라루 선장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고 러니는 기억했다.


선장님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어요. 선장님은 배를 가지고 들어가서 가능한 많은 피란민들을 태우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상급 선원 중 어느 누구도 선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대령들에게 대답하기 전에 간단한 회의를 가질 것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느 상급 선원도 여전히 선적돼 있는 제트 연료 때문에 배를 돌려 그곳을 떠나야 한다고 항의 하지도 않았다.


우리들 각자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촌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선장님이 배를 몰고 들어가라고 지시하자,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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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승선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죽음의 무르만스크 항로에서 화물을 운반했던 경험이 있는 라루 선장은 일등 항해사 디노 사비스티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피란민들을 승선시키시오. 그리고 승선한 피란민들이 1만명에 달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

러니는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피란민들은 마치 화물처럼 실렸습니다. 그들은 배의 모든 화물창고와 갑판 사이의 공간에 실렸죠. 우리는 그들에게 제공할 음식도 물도 없었어요. 의사도 없었고 통역도 없었습니다. 기온은 영하였으며 화물 창고에는 난방도 없고 전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지품을 갖고 승선했죠.

아이들이 아이들을 업고 있었고, 어머니들은 젖먹이를 안은 채 다른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고, 노인들은 아껴 둔 음식과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봤어요. 우리가 그들에게 "빨리 빨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순순히 따랐습니다. 이 말은 영어의 "Hurry! Hurry!"에 해당하는 한국어입니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말 중 하나였지요.

러니와 그의 동료 선원들이 피란민들을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태우고 있을 때 흥남을 에워싼 전투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전선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시각각 커지는 적의 위협을 느끼면서 승무원들이 가능한 많은 피란민들을 태우고 있을 때 라루 선장은 두 가지 사전조치를 취했다. 우선 해변으로부터 급히 철수를 해야할 경우를 대비해 배가 공해를 향하도록 기수를 돌려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승무원들에게 피란민들을 태우는 동안 계속 엔진을 가동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혹독한 겨울 날씨는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때때로 바람은 강풍으로 바뀌었고 눈이 내렸다. 흥남에 있는 무선 및 유선통신 부대가 화재로 마비되고 장비의 대부분이 못쓰게 돼서 해안의 부대들 사이의 통신은 더욱 힘들어졌다.

배에 승선한 첫 번째 피란민들은 갑판으로부터 5층 아래인 다섯 번째 화물창으로 안내됐다. 이 배의 항해일지는 당시 승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50년 12월 22일 저녁에 시작된 승선 기록은 피란민들의 승선이 그날 밤 9시 30분에 시작돼 다음 날 아침 11시 10분까지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1:30  플랫폼을 통해 제5화물창 피란민 승선 시작.

22:00  플랫폼을 통해 제4화물창 승선 시작. 사다리를 이용해 제 1,2,3화물창에 승선 중.

23:15  플랫폼을 통해 제2,3화물창 피란민들 승선 시작

24:00  5개의 화물창 피란민들 승선 계속. 전등과 전선을 확인. 순시 완료. 갑판 순시 완료.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피란민들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 직전 한 대의 지프가 선착장을 빠르게 달려 내려왔다. 한 젊은 육군 대위가 뛰어내려서 브릿지로 달려 올라왔다. 그는 황급히 라루 선장에게 말했다.


범죄 수사대에 방금 공산주의자 몇 명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승선했을 수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무장 경호대와 함께 승선해서 부산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아서 17명의 한국군 헌병과 같이 왔습니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12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면서 날씨는 흐렸고 바다는 고요했다. 피란민의 승선이 계속되는 동안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노큐바 호 옆에 정박해 있었다. 밤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승선을 돕기 위해서 투광 조명이 사용됐는데, 훗날 라루 선장은 그 투광조명이 위험스런 상황을 더욱 위험스럽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승선을 준비하는 동안 모든 불을 켰습니다. 우리는 불빛 아래서 일렬로 정렬된 고정 표적이었지만 적의 포탄은 전혀 가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군의 중화기들 중 하나가 실수로 피란민들에게 포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죠.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한 상급선원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었어요. 서커스에서 광대가 하는 농담처럼 12명의 거인이 한 대의 소형차에 올라탔다
2 Comments
skywalker 2017.03.19 08:58  
잊혀진 전쟁이라는게 슬픕니다.
fabiano 2017.03.29 09:21  
한국전쟁은 인류사의 한 장으로서 우리 국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임에도 갈수록 잊혀지는 것이 안타깝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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