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남침에서 휴전선까지(2)
북진(1950. 10. 1) 및 평양 입성(1950. 10. 19)
서울 탈환 후 맥아더 원수는 1950년 9월 30일 적에게 최후의 항복 권고를 하였으나, 적은 이를 일축하고 계속 저항해왔다. 이에 UN은 북진을 결정하였고, 국군 제1군단이 10월 1일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한 이후 중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서도 38도선을 돌파, 북진을 계속하였다. 적은 주력을 청천강선에 재배치하고 대동강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였으나, 국군 제1ㆍ7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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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만국경 진격(1950. 10. 20~11. 24)
동부 전선으로 진격한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은 10월 10일 원산을 탈환, 17일에는 함흥을 거쳐 11월 25일 청진에 입성하는 한편, 미 제2사단 17연대는 11월 21일 한·만 국경선상에 있는 해산진까지 진격하였고, 중부 전선으로 진격한 제7사단은 10월 21일 순천, 제8사단은 10월 23일 덕천, 제6사단은 10월 26일 최초로 한·만 국경선상의 초산에 돌입하여 국토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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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개입(1950. 10. 25)과 1ㆍ4후퇴(1951. 1. 4)
UN군이 평양, 함흥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무렵인 1950년 10월 19일경부터 중공군은 은밀하게 압록강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중공군 제4야전군은 서부 지역에서 1950년 10월 25일 회천 지역의 국군에 대해 공격을 실시하였고, 제3야전군은 동부 지역에서 사상 유례없는 인해전술로 UN군을 공격해왔다. 이에 UN군은 12월 4일에는 평양을 내주고 2월 14일에는 평양을 내주고, 12월 14일에는 흥남 철수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2월 31일 38도선을 경유,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포기, 전략적 후퇴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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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재 탈환(1951. 3. 15)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던 아군은 1951년 1월 오산-제천-삼척을 연결하는 선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1월 25일 대 반격을 개시하여 서부 전선의 미 제1군단은 2월 10일 인천-김포를 거쳐 예하의 국군 제1사단이 3월 15일 수도 서울에 입성하였다. 중부 전선의 미 제9구간은 3월 15일 홍천을, 동부 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3월 27일 양양으로 진출하였으며, 3월 말에는 현재의 휴전선을 형성하여,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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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회담(1953. 7. 27)
1951년도에 접어들어 미·소는 더 이상의 전쟁이 무의미하다고 합의하여, 동년 7월 8일 예비 회담에 이어 7월 10일부터 온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으며, 그 후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군사분계선과 전쟁포로 교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1952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조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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