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은 정부수립 이후 북한은 남로당에게 대한민국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군 반란 사건 등을 일으키게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대남 적화 전략을 남침 전쟁으로 바꾸고 남한에 유격대를 남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그들의 군대를 북한에서 철수 시킨 후 주한 미군 철수를 종용하였으며, 북한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비밀리에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고 중공의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로써 소련제 무기들이 북한에 반입되었고 중공군 소속 한인계 병력들은 북한군에 편입되었다. 또한 북한군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탐색하기 위해 38도선 일대에서 무력 도발을 자행하는 동안 주한 미군이 철수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됨으로써 남침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50년 6월에 접어들어 북한은 남침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 평화공세를 전개하면서 공격 부대를 전방으로 전진 배치하고 정찰 명령과 전투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한국군은 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동태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발령해 왔던 비상 경계령을 해제한 후 북한군의 남침 전날인 6월24일에는 장병들에게 외박과 휴가를 실시함으로써 전선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남북한 군대 창설 남한은 정부 수립과 더불어 정규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1948년 8월 16일 미 군정의 조선경비대와 해양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편입되어 육군과 해군으로 각각 발족되었고 공군은 육군 소속 항공대가 1949년 10월 1일 공군으로 독립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의 정권을 수립하기 이전인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라는 정규군을 창설한 후 공산 정권의 전위대로 양성시켜 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국군의 시가행진 | 북한 정규군 사열식 |
여수·순천 10·19반란 사건(1948. 10. 19)
남로당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가 제주도의 무장 폭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게 되자,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공산분자들을 선동하여 군 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그 세력을 순천까지 확대하면서 양민들을 학살하고 약탈과 방화 등을 자행하였다. 진압군의 출동으로 사건 발생 8일만에 진압되었다.
여수·순천 군 반란 사건에 출동한 진압군 | 생포된 반란군 |
북한의 남침준비
북한군 전투배치 완료(1950. 6. 23)
북한군은 제1군단은 금천에, 2군단은 화천에 군단 사령부를 각각 설치하였고 그 예하 사단은 서부전선으로부터 제6, 1, 4, 3, 2, 12, 5사단 순으로 배치되었으며, 제13, 15사단은 제1, 2군단의 예비대로서 금천과 화천에 각각 배치되었다. 그리고 제10사단은 북한군의 예비 사단으로 숙천에 위치하였다.
남침 작전을 협의하고 있는 북한군 | 북한군의 남침 공격 명령의 암호는 ‘폭풍’으로 1950년 6월 24일 공격 개시 명령을 기다림 |
전쟁 직전 남북한 군사력 비교
구 분 | 한 국 군 | 북 한 군 |
병 력 | 105,752명 | 198,380명 |
탱 크 | 0 대 | 242 대 |
야 포 | 91 문 | 728 문 |
함 정 | 71 척 | 110 척 |
항 공 기 | 22 대 | 211 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