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신부가 찍은 6/25전쟁 직후 부산
fabiano
그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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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05:33
한국전쟁이 끝난지 4년 뒤인 1957년 12월.
미국신부 알로이시오(한국명 소재건.1930~1992.사진(中))에게 부산은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다가섰다.
1949년 부산의 인구는 47만.
전쟁이 터지면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1951년에는 84만, 1957년에는 1백2만명으로 늘어났다.
돌아갈 고향도, 먹고 살 땅 한평 없는 피란민들은 산비탈에 눌러앉았다.
거리는 부랑아와 전쟁고아들로 넘쳐났다.
▷ "한국 어린이에게 도움을"
"도와주세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입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소년의 집 운영기금을 마련하기위해 엽서를 만들어 미국의 독지가들에게 보냈다.
▷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중에는 혼혈아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같은 처지의 고아들 사이에서도 멸시와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 목마른 양동이 행렬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비를 피하고 몸을 누일 곳이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하루 두번 오는 급수차를 기다리는 양동이가 부산 아미동 난민촌 언덕에 길게 줄지어 있다.
▷ 고아 수용소
고향도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가 돼버렸다.
폭행과 감금,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의 눈빛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갈 곳 없는 피란민들은 부산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960년대 초반에 촬영된 아미동 산자락의 난민촌 전경
▷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갈 곳 없는 피란민들은 부산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960년대 초반에 촬영된 아미동 산자락의 난민촌 전경
▷ 엄마'수녀님
'소년의 집' 전신인 '송도가정'에 입양돼 잠든 아이들.
이곳은 '엄마'수녀와 아이들이 함께 살도록 가족단위로 운영됐다.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던 고아들은 여기서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맛보게 된다.
http://kr.fun.yahoo.com/NBBS/nbbs_view.html?bi=1201&mi=629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