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선거와 대통령 직선제의 확립
한미동맹의 체결은 19세기말 고종 황제가 추구했던 목표였다. 이지러져 가는 조선 왕조를 구출하기 위해 동맹국을 찾음에 있어서 고종 황제가 최우선 조건으로 삼았던 것이 "영토적 야심이 없는" 강대국이었다. 당시 그 조건에 맞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고종은 미국을 동맹국으로 삼는데 실패했지만, 반세기 뒤에 이승만은 성공하였다. 이승만의 의도로, 한미동맹은 북한, 러시아, 중국에 대항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항한 것이기도 하였다. 한미동맹은 그러한 이중적인 목표와 맞았고, 그 때문에 대한민국은 그 울타리 안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로버트 올리버의 지적대로, 이승만은 自由放任(자유방임)의 미덕을 믿는 제퍼슨 적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태도는 지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農地改革(농지개혁)을 추진하게 했고, 그 결과로 한국 사회는 자작농 사회와 자유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이승만은 민주제의 핵심인 自由選擧(자유선거)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가 근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자였다는 것은 12년간 통치기간에 국회의원 선거든, 대통령 선거든,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자기에게 불리한 경우에도 어김없이 선거를 치렀다.
또한 국회를 해산하거나 인위적으로 정당을 개편한 적도 없었다. 야당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존속하지 못할 정도의 가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55년부터는 민주당이 출현함으로써 자유당과 함께 양당제도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민당계의 <동아일보>, 흥사단계의 <사상계>, 카톨릭 계의 <경향신문>이 거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특히 1952년부터 대통령 선출 방식을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 선거로 바꾸는 대통령 直選制(직선제)를 도입하였다. 대통령 직선제의 시행에는 '발췌개헌안'과 '4사5입개헌'이라는 무리한 방법이 따르고 선거부정 시비가 일기도 했지만, 선거는 4년마다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민주제의 핵심적인 제도를 자유선거, 특히 대통령 직선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987년의 '6.29선언' 이후의 이른바 '민주화'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도입한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엘리트 育成(육성)과 산업화 토대의 마련
미국식 자유민주 체제에 대한 그의 신념은 주권자인 국민의 교육정책으로 나타났다. 국민의 대부분이 문맹인 나라에서 미국식 자유민주체제의 실현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義務敎育(의무교육)제도의 시행을 서두르게 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작은 예산이기는 하지만 연평균 10%이상이 교육에 투자되었다. 그 결과로 임기 말인 1959년에 오면 학령아동의 95.3%가 취학하고, 국민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지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 때문에 로버트 올리버는 그를 가리켜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의 교육정책은 새로운 '엘리트' 양성에서도 나타났다. 1953∼1960년 기간에 해외 정규 유학생으로 4,884명이 미국을 주로한 선진국으로 나갔다. 1953∼1961년 기간에 단기연수 기술훈련생으로 2,309명의 기술자가 해외로 나갔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온 군 장교와 하사관은 1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나중에 산업화에 기여한 귀중한 인재들이었다.
충주 비료, 문경 시멘트, 인천 판유리공장의 건설로 중화학 공업의 토대가 놓이고, 영암선, 태백선 등 수많은 철도의 건설로 산업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그 결과로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휴전이후(1953∼1959)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5.1%로 높았다. 통치기간 전체의 평균 성장률은 4.2%로 높았다.
그리고 1959년에 산업발전위원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박정희 통치 기의 경제기획원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의 선례가 되었다.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모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반공주의에는 모두 기독교 윤리가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의 잘못된 생활태도를 문제 삼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남을 타도하기 위한 革命(혁명)을 정당화하는 그릇된 인생관을 갖는 한, 그들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kon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