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6.25는 사변일까? 전쟁일까?
개전초기 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민군 전차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소련은 지금까지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지지해왔으나 최근들어 중립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남침설이 등장하고 있다. (■ 촬영일자 : 1950년 7월 1일 )
인민군 탱크들 -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6.25 남침하의 서울에서 이른바 `의용군` 끌려가는 장정들.
6.25 전쟁때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T-34-85형 인민군 탱크. 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다.
"아아! 잊으리. 어찌 우리그날을 !!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은 그날을.."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통고없는 침략으로 남한에 탱크로 밀려올때 서울의 시민들은 새벽 단잠에 빠져 있었다. 미아리를 넘어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북한군의 탱크에 무력한 아군은 한강철교를 최종적으로 폭파했고, 수많은 시민들은 부서진 다리 위를 간신히 넘어 남하를 시작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인 이 대사건에 대해서, 예전에는 '6 · 25 사변'이라고 호칭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전쟁' 이라고 호칭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더니,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인터넷 블로깅을 하다가, 어떤이가 남 북한의 대 사건을 가리켜 '6 .25 전쟁' 이라야 맞는지. '6 25 사변' 이 맞는지를 지적한 것을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 중, 고등학생 국사 교과서에 실린 이 부분도 호칭 조차 하나로 통일이 안되어 있다.
'사변(事變)'이란 말 그대로 오랑캐(불의의 침략자)들이 변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6 · 25 사변'이 '한국전쟁'으로 호칭되면서, 남북한 간의 명분의 우열은 애매하게 되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그저 그런 전쟁의 당사자 였을 뿐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 정치학에서는 '6 · 25 사변'이라는 용어 대신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이다. 제3자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남한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봐야 하는가?
흥남철수광경. 흥남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LST`를 다투어 타고 있다. 이 사진은 미공개기록사진 중의 하나다.
철수함정을 타려고 흥남부두에 쇄도한 북한동포들 - 1950년 12월12일부터 약 한달동안,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약10만명의 북한동포가 해상을 통해 남쪽으로 탈출했는데 사진은 이 때의 광경이다. 수십척의 함정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이들 수송은 한국과 유엔군의 철수 못지않게 대규모적인 것이었으며, 큰 기적을 이룬 작전으로 유명했다.
남으로...남으로... 50년 7월29일 국군의 소개명령으로 지게나 소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
폐허속에서 노숙하는 전란민 가족(1950년 9월)
완전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가와 전난민들(1950년 9월28일 서울수복당시)
북한동포의 목숨 건 남하 행렬 - 1950년 12월4일 평양을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북한동포들은 이렇게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결사적으로 건너 남하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민들 - 51년 1. 4 후퇴때 서울시민들이 철도에서 피난하고 있는 모습 - 이고...지고..피란행렬. 51년 1.4후퇴 때 서울시민들이 철도를 따라 피란하고 있다. 피란보따리 위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보아라! 이 사진들을. 김일성이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북녁의 형제들을 총알받이로 해 아무 통고도 없이 쳐들어온 50년 6.25 그날을. 그리고 반세기가넘도록 남북이 분단 되어 남아있는 지구상 유일의 이 나라 아니 겠는가?
2백만여 명의 남과 북 형제, 부모가 목숨을 잃고, 도시와 고향은 온통 잿더미로 변해 버린 이산하. 전쟁을 겪는 50년대 전후 세대들은 기억을 한다. 그리고 60년대 세대도 부모로부터 피부로 느낀다. 그러나 이후 세대부터는 역사관에 큰 문제가 생겼다.
70년대 세대? 잘 모른다. 30대중에 37%가 몇월 달에 벌어 졌는지를 모른다. 역사관이 낙제점 이다. 80년대, 90년대 ? 이들은 아예 모른다. 전쟁이 있었는지 조차 모른다. 호칭도 모른다.
이들과는 거의 할 말을 잃게 된다.<기사 참고- 20대 절반, ‘6·25 터진 해’ 몰라, 30代는 37%가 몰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5/2007062500077.html>
이 시대에 태어난 일부 철없는 사람들이여! '한국 전쟁' 인지 '사변'인지도 모르는 그대들이여! 6. 25가 뭔지도 모르고 북한을 찬양하는 일부의 그릇된 사람들이여! 이 나라가 어찌 고통스럽게 걸어 왔는지 모른다면 이제라도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 똑똑히 기억 해두자.
만약에 훨씬 뒤에 태어나서 몰랐다면...이 분들은 지금이라도 부모와 조부모에게서 역사를 바로 배워라! 그리하여 머릿속에 바르게 역사를 담아 두자.
아래 저 사진의 모습을 자세히 보아라 . 전쟁 직후 헐벗고 굶주림에 지쳤던 그 모습들이 지금의 조부모 모습이었음을 아는가? 그분들이 고난의 세월을 의지로 일어서서 현재 이 나라를 이렇게 키웠고 살려 놓은 것이다. 지금의 당신들이 이 만큼 먹고, 입고, 쓸 수 있음이 다 그분들의 덕임을 앞르로도 결코 잊어선 안된다.
한국전쟁 - 38선. 정전협정#
38선을 긋는 순간 -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레이 대령(왼쪽)과 인민군 연락장교 장춘산(오른쪽)이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정하는 협정을 시작하고 지도에 38선을 긋고 있다.(1951.11.26)
1953년 7월 27일 하오 10시 정각부터 12분간에 걸쳐 조인된 정전협정문의 서명.
뒷 배경은 미국과 소련이 그 역할을 맡아 했던 그 전쟁. 결과적으로 우리끼리 벌인 전쟁 꼴이 되었고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댄 그 전쟁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한다.그네들이 보면 전쟁이요 우리 입장은 사변임을 명심해야 함을..
그리고 남은 건 남의 힘이 아닌 우리 힘으로 통일되는 것. 남은 과제는 저런 무력의 625 사변이 아닌 원만한 대화로 통일을 만들어 가야함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