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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 음식 이야기② 옛 여자 친구의 레시피

fabiano 2 2318  

[포브스코리아] 피카소에게 여자란 창조적인 작업의 원천이자 인생과 예술 속에 녹아 있는 불가결의 존재였다. 피카소의 여인을 따라가 보면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파블로 피카소 ‘장어 마틀로트’ 1960, 캔버스에 유채.


1961년 3월 14일,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가 자크린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신문의 표제를 장식했다. 심지어 피카소의 가까운 친구들도 보도가 있기 전까지 이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피카소보다 거의 50세 연하였던 자크린은 마치 그림자처럼 피카소의 옆을 지켰고, 자기 자신은 아예 없는 듯, 피카소의 모든 변덕을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자크린이 만드는 요리에는 자극적인 맛보다는 피카소의 건강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위 수술을 받은 피카소는 담배를 손에 댈 수 없었고, 먹고 마시는 데 항상 조심해야만 했으며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남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시선도 시력이 떨어져 둔감해지고, 청력도 감퇴되어 이제는 방문객과 재치 넘치는 논쟁을 벌이는 일도 거의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피카소일지라도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검소한 식사’ 1904, 아연에 에칭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상상력은 흐려지지 않았다. 상상 속에서 그는 약해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했다. ‘장어 마틀로트’는 자크린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린, 요리에 대한 헌사로 바치는 피카소의 그림이다. 스태미나에 좋다는 장어와 양파가 주재료인 이 요리는 그림으로 보기에도 성적인 상징성을 띤다. 구불구불 꿈틀대는 긴 장어는 힘 있는 남성을, 붉은 빛을 띤 즙 많은 둥근 양파는 여성을 닮았다.

자크린은 피카소가 작업에 몰두할 때는 집안일을 돌보았고, 매력적이고 세심한 안주인 역할도 훌륭하게 해냈다. 피카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의 사랑에 의존했다. 젊어서는 여인에 대한 욕망이 그에게 생명력의 원천이었다면, 이제는 여인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사랑 중독에 가까웠다. 심지어 아주 짧은 기간이라도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공백 상태에서는 창조적인 일에 거의 몰입할 수가 없었다.

스물여덟 살 때부터 피카소는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서른여덟 살이 되어서는 이미 부자가 되었고, 예순다섯 살이 되던 1946년 무렵에는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없는 백만장자였다. 피카소는 그와 함께했던 여인에 따라 작품의 스타일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시대나 사회의 영향이 적었다거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피카소가 사귄 여인과의 관계는 그의 양식의 변화에 확실한 선을 그어주기 때문에 그 여인을 따라가 보면 그가 긴 생애 동안 남겨놓은 5만 점이나 되는 작품의 복잡한 조형적 흐름이 쉽게 파악된다는 뜻이다.

그의 곁에 머물다 간 일곱 명의 여인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세워놓은 모델이 아니었다. 그들은 피카소의 인생과 예술 속에 함께 녹아들어 갔던, 그러니까 피카소라는 걸작을 상연하는 무대 위의 등장인물이었다. 물론 등장인물의 역할에 따라 무대배경도 자주 바뀌었다. 여러 저택과 영지, 그리고 성이 피카소의 삶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는데, 거주지의 변화는 피카소의 생활범주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기존의 연인이 다른 연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로방스 출신의 자크린과는 남부 프랑스에 정착했다. 칸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구한 빌라 ‘라 칼리포르니’는 전망이 탁 트인, 거대한 19세기식 여름 저택이었다. 그곳에서 피카소는 예전처럼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밤새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점차 드넓은 빌라의 담 안쪽으로 운둔하는 삶을 즐기게 되었다. 사실 피카소는 이렇듯 조용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채워지지 않는 의욕을 지닌 사람이었다. 특히 말년 무렵에 피카소를 괴롭혔던 생각은 곧 남자로서 여자에게 엄청난 사랑을 쏟아 붓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었다. 그에게 열정의 소멸이란 모든 창조적인 작업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천재 예술가의 삶을 좌우한 여인

파블로 피카소 ‘선술집’ 1913~1914, 카드보드에 유채.


“피카소에게 여자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며,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라고 페르낭드 올리비에(1881~1966)는 자신의 회고록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에서 언급한다. 피카소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최초의 여인이었던 페르낭드는 처음으로 피카소라는 천재와 그의 신화가 탄생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피카소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피카소를 모르고 있었다면, 특별히 매혹적인 사람은 아니다. 물론 강렬한 눈빛 때문에 집중이 되긴 했다. 이런 사람이 어디서 왔을까,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지닌 열정과 불꽃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그가 나를 알고 싶어 하자,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어졌다.”

피카소가 페르낭드를 만난 것은 고향 스페인을 떠나 파리 몽마르트르의 허름한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이었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라면, 그리고 아름답고 마음 얻기도 쉬운 뮤즈 같은 여자라면 모두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모여들고 있을 때였다. 특히 배고픈 예술가라면 그곳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곳 카페의 주인들은 언제든지 그림을 받고 외상을 탕감해줄 용의가 있었으니까. 이 시기에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벌거벗은 그의 상태를 말해준다. ‘검소한 식사’에서 왼쪽에 있는 핼쑥한 옆얼굴의 남자는 맹인 같아 보인다. 비쩍 마르다 못해 뼈가 앙상한 팔과 손가락… 두 사람은 딱딱해 보이는 빵과 싸구려 포도주로 방금 끼니를 때운 모양인데, 얼굴을 보니 세상에 즐거움이란 하나도 없다는 표정이다.

모델이었던 페르낭드는 ‘미녀 페르낭드(la Belle Fernande)’라고 불렸다. 다갈색 머리칼과 초록색 눈, 우윳빛 피부와 굴곡 있는 몸매, 그리고 무엇보다 무심한 성격에서 뿜어 나오는 그녀의 매력에 ‘미녀’라는 단어는 결코 아깝지 않았다. 페르낭드의 싱그러움은 피카소의 캔버스를 지배하던 우울한 청색을 차츰 몰아냈고, 그녀가 자기 짐을 피카소의 아틀리에로 옮긴 후에 푸른색은 완연한 장밋빛으로 바뀌었다.

밥 먹을 돈이 없으면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점심을 배달시키고, 배달부가 도착하면 일부러 아무도 없는 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배달부는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문 앞에 놓고 갔고, 둘은 얼른 음식을 들여왔다. 물론 며칠 후에 돈이 생기면 외상값을 갚았다. 배달부가 끈질기게 문 앞에 버티고 있는 날엔 임기응변에 뛰어난 페르낭드가 이렇게 외쳤다. “그냥 문 앞에 놓고 가세요. 우린 지금 옷을 벗은 채 있거든요.”

1906년 봄, 화상인 볼라르는 피카소의 그림 30점을 모두 사들였다. 그는 금화 2000프랑을 지불했고, 이 금액은 몇 년 동안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거금이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해 유명세를 타게 된 1908년부터는 그림이 더 많이 팔렸다. 피카소는 친구들을 불러 축하파티를 벌였는데, 기욤 아폴리네르, 거트루드 스타인 등 당시 문화계의 거물들이 거기에 끼어 있었다. 페르낭드는 스페인 여행 중에 배운 레시피로, 스페인식 리소토(risotto)라고 할 수 있는 파에야(paella)를 만들었다. 물론 바닥이 평평하고 손잡이가 두 개 달린 스페인 전통 프라이팬은 없었지만, 이웃집에서 커다란 솥을 빌려왔다. 그녀는 쌀알이 들러붙지 않도록 육수인 부용(bouillon)을 틈틈이 떠 넣으며 숯불 위에서 오래도록 조렸다. 토끼고기와 닭고기, 소시지를 곁들이고 사프란으로 그윽하게 향을 돋운 발렌시아식 파에야는 그날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해지고 돈을 벌게 되면서 피카소의 생활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난한 몽마르트르에서 벗어나 자주 시내로 나가 괜찮은 외식을 즐겼다. ‘선술집’은 그 무렵에 그려진 그림이다. 좁은 테이블 위에는 메뉴가 놓여있고 샴페인 코르크, 포크와 나이프가 보인다. 코르크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피카소는 표면에 톱밥을 붙여 표현했다.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고 약간은 떠들썩한 레스토랑에서 얼굴을 서로 들이대듯 마주하고 있는 연인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피카소의 앞자리에도 어느덧 페르낭드가 아닌 새로 만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첫 여자 친구의 요리와 함께했던 젊은 시절 몽마르트르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글=이주은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 Comments
abendort 2015.02.23 01:19  
음식과 sex를 동일 카테고리로 분류한 영화들이 많더군요.  결국 그 말도 일리가 잇다고 생각 됩니다.  달리가 음식으로 소재를 만들엇듯이...피카소도 그런걸 보면 음식과 섹스는 같은 맥락? 이 아닌지요.  피카소에겐 여자도 맛잇는 음식으로 보엿을겁니다.
fabiano 2015.02.23 13:11  
섹스의 근원도 음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피카소에게 있어 여인들은 확실히 예술의 근원이자, 맛있는 음식의 한 종류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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