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빛난 대통령 ①
박정희대통령은 1932년 4월8일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 5년간 수학한 뒤에 1937년 3월25일에 졸업하였다. 만 15세에서 20세에 걸친 인격 형성기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시도 쓰고 서예에도 능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운동은 만능이었고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그는 균형 감각을 가진 교양인이었다. 이런 인격의 틀이 잡힌 것은 대구 사범학교의 이른바 전인교육 이었다.
대구사범학교시절,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좋은 어머니를 가진 것은 가슴에 신을 품은 것과 같다. - 박정희 대통령 일기 중에서-
두 분은 대구시 삼덕동에 신혼살림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전황이 긴박해지자 박정희는 신혼 5일 만에 강원도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박대통령은 작달만한 키에 야윈 편이나 탄탄한 체격이었다. 그의 얼굴, 모습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얼굴 특색, 즉 높은 이마, 편편한 안면, 뚜렷한 눈썹, 굳게 다문 입, 곧고 우뚝한 콧날 등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안색은 오랫동안 야영생활을 해 온 군인의 모습이었다.
71년 11월 4일, 박대통령이 자신의 생일날에 유년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린 구미 상모리 고향집박대통령은 정치적 일상과 공무로 바쁜 틈을 비집어 한 자연인으로 돌아가 붓을 들고 즐겨 캔버스를 채색했다.60년대 무렵부터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박대통령은 74년 육 여사 사후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박대통령에게는 특별한 위안이었음에 틀림없다.
스스로를 농민의 아들이라 했던 그는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농부들과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 는 말 대신 "가난은 나라만이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간 박대통령 - 중앙일보" 실록 박정희에서-
왕복 40리 길을 걸어서 초등학교를 통학하고 극심한 영양실조로 야맹증까지 얻을 만큼 가난에 찌들었던 빈농의 아들 박정희는 한시도 자신이 농부의 아들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식량자급을 가난추방의 첫걸음으로 간주했다. 그는 식량문제 해결 없이는 국가 안보 또한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 였다. 이른바 '박정희식'은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좌우 살피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 붙이는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말한다. 통일벼 보급과정에서도 특유의 박정희식이 적용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중 농촌시찰에 나서면 언제나 신이 나는 사람이었다.-1973년 축산 농가를 방문하여 송아지를 만지며 즐거워하시는 박정희 대통령-
남해안 고속도로를 공중시찰한 뒤 공업단지 예정지인 광양만 일대를 해상 시찰하면서 선상에서 작업지시를 하고 있다 .
"나도 물론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 살 수 있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습니다.- 박대통령 회고 중에서-
유신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눈이 올때 스스로 자기 마당을 쓰는 것이다. -청와대 직원들과 함께 눈을 치우러 가시는 박 대통령-
"하면 된 다" 박대통령이 남긴 이 한마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한다. 좌절과 낙심, 가난과 무지의 땅에 소망과 확신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고 보여 주었다.
가난과 망국과 전란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 속 깊이 뭉쳐 두었던 한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아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가슴에 총을 맞고도 체념한 듯 담담하게 "난 괜찮아 !"라며 최후를 맞은 이가 혁명가 박정희였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박대통령은 "자손을 위해 미전(좋은 땅)을 사지 않는다"는 일본 한시를 자주 암송하곤 했다. 실제로 박대통령이 1남2녀의 자손을 위해 남긴 재산은 대통령이 되기 전 살았던 서울 신당동 집 한 채 뿐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의 밝은 귀가 되어 국민의 소리를 바르게 전함으로써 국민과 위정자와의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놓으려고 노력했던 육영수여사님, "청와대 야당"으로서 많은 이의 가슴에 오늘도 살아 남아있다
박정희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헤쳐가면서 영욕과 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더러운 강물 같은 한 시대를 삼켜서 바다와 같은 다른 시대를 빛낸 사람이다.
|
from Cyworld.com http://www.cyworld.com/hanco2007/194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