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선생 묘소
토정선생의 후손을 비롯하여 10여基의 묘소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토정선생의 묘소위로 보령화력 발전소에서 송출되는 345KV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고압선이 지나가고 있다.
토정선생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다.
숭록대부 [崇祿大夫]
고려시대에는 1298년(충렬왕 24)에 문종 때 제정한 문산계(文散階)를 개정하면서 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숭록대부로 고쳤다. 당시에는 정1품의 관등이 없어 숭록대부는 최고의 관등이었다.
1308년에는 중대광(重大匡)으로 개칭되었고, 종1품을 상 ·하로 구분하였을 때는 상을 삼중대광, 하를 중대광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초에 동반관계(東班官階)를 제정하면서 종1품 상을 숭록대부라 하였는데, 관직으로는 의정부의 좌 ·우찬성, 돈령부 ·의금부 ·중추원의 판사 등을 맡았다.
가선대부 [嘉善大夫]
초기에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관계로도 사용하였다. 이 관계에는 군(君) ·위(尉) ·동지사(同知事) ·참판 ·좌우윤(左右尹) ·대사헌 ·내각제학(內閣提學) ·제학 ·세자좌우부빈객(世子左右副賓客) ·부총관(副摠管) ·훈련대장 ·수어사(守禦使) ·통제사 ·개성부관리영사(開城府管理營使) ·군문중군(軍門中軍) ·금군별장(禁軍別將) 등이 해당된다.
토정 이지함 선생과 부인 한산이씨의 합장묘비.
토정 이지함 선생의 영문 안내판.
10여基의 토정선생의 일가의 묘소는 충남 문화재 32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마포구 토정동 소재 한강삼성아파트 입구 쪽이 토정이 토담집을 짓고 살던 자리다.
그곳에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아래 글은 天地也人의 글에서 퍼옴)
이지함은 매월당 김시습·북창 정렴 등과 더불어 조선 3대 기인의 한 사람에 속한다. 무속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보면 이지함의 도력(道力)이 높이 평가된다는 얘기다.
이지함의 외모 묘사를 보자.
“그는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다.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다. 안광이 빛나고, 목소리는 웅장하면서 상쾌하다. 특히 발이 한자를 넘는다.” “그는 천성이 욕심이 적어 명예와 재물, 여색에 담연하였으나, 때로 농담도 하고 장중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발이 한자를 넘을 정도의 거인에다 거칠 것 없는 행실을 보인다는 점으로 봐 도인의 풍모가 떠오른다. 게다가 천문·지리·복서·의학 등에 달통했다는 평이고 보면 그러한 심증을 굳혀준다. 도학의 세계에서는 배가 불뚝 나오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달마대사와 같은 사람이 득도의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지함은 기인이라는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지함의 묘소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자. ‘아산현감으로 등용된 뒤에는 걸인청을 만들어 걸인을 구제하고 노약자와 굶주린 이들을 구호했다. 그후 대부분의 생애를 마포의 토담집에서 청빈하게 지냈는데….’
이지함은 아산현감 재직시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도 현감직 이후 마포에서 산 것으로 잘못 기록돼 있다. 이지함의 생애와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책으로는 후손들에게 유사시 보도록 했다는 “토정가장결”과 주역을 발전시킨 역서(易書)인 “월영도”, 후손인 이정익(李楨翊)이 정리한 “토정유고” 2권1책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토정유고”에 수록된 이지함 관련 생애는 1573년 탁행(卓行·좋은 행실)으로 천거돼 포천현감을 했던 이후의 행적만 나와 있다. 이밖에 “연려실기술” “석담일기” 등에 많은 일화가 소개돼 있는데, 시간의 선후관계를 밝히기가 힘들다.
이지함은 1517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아버지 이치(李穉)와 어머니 광주 김씨 사이에 출생했다. 그런데 그의 고향 장산리는 1959년 청천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됐다. 한가지 미묘한 것은 그가 토정 외에 수산(水山)이란 호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집터가 수몰된 것과 수산이란 호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태어난 16세기는 사화와 함께 시작한다. 사화는 조선을 건국했던 훈구척신들과 이들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사림의 싸움을 말한다. 훈구파에 패배한 사림들은 정치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대개 은거의 삶을 택하며 후일을 모색한다. 이들은 향촌을 중심으로 학문을 닦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육에 전념했다.
‘1년 사이 문장이 물 솟구치듯’ 발전
하지만 이들이 현실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지만은 않았다. 자유롭고 비판자적인 입장에서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으며, 때로는 국정에 참여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민중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유리걸식하는 자가 허다했다. 이들 중에는 살기 위해 도적이 되기도 했는데 명종 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3년여를 활동했던 의적 임꺽정은 이들의 대변자였던 셈이다.
커다란 사회변혁기를 살았던 이지함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16세 때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지함은 형 지번(之蕃)과 함께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때부터 큰형 지번은 지함의 아버지요, 글을 가르쳐준 스승의 역할을 했다. 시묘살이를 마치고 지번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온 이지함은 모산수(정종의 후손, 정4품) 정랑(呈郞)의 딸과 결혼했다. 23세 때(중종 34·1539) 장남인 산두(山斗)와 큰형 지번의 아들인 산해(山海), 둘째형 지무의 아들 산보(山甫)가 태어났다.
이지함은 결혼 후 광릉농장에서 1년동안 독학하면서 사서삼경에 달통하게 된다. 이 시기 이지함은 하인에게 밤에 쓸 등유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장인이 그의 건강을 염려해 등유를 보내지 않자 이지함 본인이 직접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 관솔을 따서 불을 밝히며 공부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한 결과 그의 학문은 대단하게 진전했는데, 영의정을 지낸 조카 산해는 묘비명에서 “1년 사이에 문장이 물이 솟구치듯 하고 산이 자태를 뽐내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학문에 흥미를 느낀 이지함은 송도에 사는 서경덕(화담)의 제자가 된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로 살았던 서화담에게서 주기론 중심의 이기일원론과 제가잡술 등을 배웠을 것이다.
스승의 영향이었을까. 이지함은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마지못해 과거에 나갔지만 답안을 쓰지 않고 나오기도 했고, 또 답안을 제출하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소, 나는 내 좋은 대로 살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 또 한가지 형 지번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것도 역시 과거를 등한시한 원인으로 해석된다.
29세 때(명종 1년) 스승 서화담이 타계했다. 그리고 다음해 지번이 3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런데 이지함의 나이 33세 때 죽마고우였던 안명세(安名世)가 사형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유능한 사관이었던 안명세는 사관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을사사화(1545) 때 윤원형·이기 같은 소윤 일파가 윤임 등 대윤을 모함해 죽였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윤원형 일파가 절대 볼 수 없는 사초를 보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처형한 것이다.
죽마고우 안명세 죽음이 인생 크게 바꿔놓아 실의에 빠진 그가 장인과 처남의 운수를 짚어보니 불길한 괘가 나왔다. 그는 형에게 “내가 처가를 관찰했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이에 피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나에게까지 미칠 것이오”라고 말하며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곧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이른바 이홍남의 고변사건(청홍도 사건)이다. 이는 형제인 이홍남과 이홍윤의 감정대립이 불러온 역모 고변사건이었다. 이홍남은 동생 이홍윤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고변하게 되는데, 이 역모사건의 괴수로 이지함의 장인인 이정랑이 걸려들게 됐다. 이로 인해 이지함의 처가는 풍비박산났고, 이지함도 연좌법에 의해 양반 신분에서 천민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됐다.
안명세사건과 청홍도사건은 이지함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때부터 그는 처가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았다. 또 서해의 고향 앞바다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가 가을에 수확해 바가지로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수년만에 수천섬의 양곡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양곡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이러한 경험이 실학사상의 기초가 된 무역과 상업론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이 무렵 그는 마포에 흙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들에게는 도움을 베풀었지만 그 가족은 곤궁하게 살았다. 그는 베옷에 짚신을 신고, 삿갓을 쓰고 다녔다. 외출할 때는 철관을 쓰고 나갔다가 식사 때가 되면 그것을 솥으로 이용하고, 다시 씻어 관처럼 썼다고 한다.
그는 또한 제주도에 세번이나 다녀왔다. 그때마다 쪽배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달아 풍파를 견뎌냈다고 전한다. 토정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고 전국 산천을 떠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열흘동안 화식하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더위에도 물을 마시지 않아 주위 사람들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대부들과 놀면서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기도 했다. 정신과 행동 모든 면에서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 문제만은 매우 조심했던 모양이다. 서경덕이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쳤듯 제자인 이지함도 여자에게는 조신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제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제주의 관원이 그의 이름을 익히 듣고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들게 했다.
그리고 기생에게는 이지함의 사랑을 얻는다면 창고의 양식을 모두 상으로 주겠다고 제의했다. 온갖 아양을 떨었지만 기생은 끝내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일찍이 아들·조카들에게 “여색에 엄하지 못하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고 훈계했던 터다. 51세 되던 해 선조가 등극하면서 정국이 쇄신되고 사림파가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3세이던 1570년 이홍남고변사건의 죄인들이 사면됐다. 이지함도 법적으로 자유인이 됐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자유인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힘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수없이 보았다. 이이·성혼·조식 등의 학자들을 만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도 토론했다.
그는 소유나 명예가 부질없음을 알았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거리낌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이지함의 명성을 들은 중봉 조헌이 제자가 되겠다고 그를 찾아왔다. 이지함은 55세, 조헌은 28세. 27년의 나이차를 넘어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다음해인 1572년 조헌이 홍문관 정자의 자리에서 파직되자 두 사람은 부여의 강사(江寺)에서 놀다가 지리산 홍운동의 서기(徐起)를 찾아가 친교를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어느 때고 인재가 없었던 적은 없다’
1573년 이지함은 탁행으로 추천돼 포천현감(종6품)이 됐다. 마음 속에 품었던 가난구제책을 실현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현감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조사해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사직하고 나왔다. 자리에 연연할 그가 아니었다.
유리걸식하는 민중의 구제를 최대 목표로 생각하던 이지함은 3대창고론을 주장했다. 3대창고론은 이지함의 사상이 집약된 ‘국부론’이라 할 수 있다. 첫째가 도덕의 창고인 인심을 계발해 화평한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 사대부들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수기치인하며 도덕을 지키면 백성은 경제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따라서 재물은 풍족해지고 그 재물이 균분돼 민생은 윤택해지고 이상적인 대동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인재창고론이다. 어느 때에도 인재가 없었던 적이 없는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지함은 인재를 보는 눈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약을 쓸 수 없는 사람처럼 중병에 걸렸다. 하지만 기묘한 계책이 하나 있기는 하다. 이이가 조정에 머무른다면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이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려 했다. 그러자 “공자나 맹자 같은 성현이 병을 핑계로 제왕들의 부름을 받지 않는 것을 후세의 선비들이 본받는 것은 나태한 중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같다”며 호되게 질책했다.
또한 제자인 조헌에게 지극한 애정을 보였다. 조헌이 통진현감이 되자 찾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에 대해 논했다. 그는 또 조헌에 대해 “초야의 인재로서 쓸 만한 인물은 조헌밖에 없다”면서 “그의 우국충절은 나의 스승”이라고 격찬했다. 강직한 조헌은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보인다.
셋째는 재용창고론이다. 육지와 바다는 1백가지로 소용되는 물산을 저장한 창고다. 이 창고에서 나는 은·옥·물고기·소금 등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 누구나 생산하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당시는 모든 산물을 다만 그 고을에서만 취하여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항상 금지해 취용하지 못하게 하니 잘못된 일이라는 지적이었다.
또 인간의 덕이 근본이고, 재물은 지엽적인 것이지만 근본과 지엽이 상보작용을 이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62세인 1578년 다시금 조정의 부름을 받은 이지함은 아산 현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걸인들이 많자 그는 걸인청을 만들어 그들을 수용했다. 단지 수용뿐 아니라 그들에게 자활교육을 시켰다.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게 하여 각자 능력에 따라 기술을 익히게 했다. 그리고 임금에게 진상을 올리는 숭어양어장을 폐쇄해 농토로 만들었다. 봉건시대 때 이러한 결정은 자리를 내놓을 정도의 과감한 일이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지함은 가난한 백성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줬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자유인인 이지함은 그해 눈을 감았다.
연 표
1517 중종 12년 1세 아버지 穉와 광주김씨 사이 출생
1530 중종 25년 14세 아버지 별세
1532 중종 27년 16세 어머니 별세
1539 중종 34년 23세 장남 山斗 태어남. 조카 山海, 山甫도 태어남
1545 명종 1년 29세 스승인 서화담 죽음
1546 명종 2년 30세 큰 형 지번 진사가 됨
1549 명종 5년 33세 친구 안명세 사형당함. 이홍남의 고변사건 연루돼 장인 사형당함
1559 명종 15년 43세 장남 山斗 죽음. 1559-1562 임꺽정의 난
1569 선조 2년 53세 형 지번 청풍군수 제수
1570 선조 3년 54세 이홍남 고변사건의 죄인들 사면됨
1571 선조 4년 55세 28세의 중봉, 토정 찾아감
1572 선조 5년 56세 조헌이 홍문관 정자에서 파직되자 그와 함께 부여의 江寺에서 놀다가 지리산 홍운동의 徐起 찾아감
1573 선조 6년 57세 포천현감에 임명됨. 1574 선조 7년 58세 포천현감직 사직. 남소문동 인가에 우거 .
1575 선조 8년 59세 4월 큰형 지번 사망. 겨울에 조헌이 한강 입구 통진현감으로 부임하자 찾아감
1578 선조 11년 62세 3월 율곡의 대사간 사임 만류. 율곡이 듣지 않자 4월에 다시 찾아가 석담으로 돌아가는 것 힐책. 4월 아산현감에 임명됨. 7월17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