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저멀리에...(12)
* * 슬픈 지난날들(2) * *
늦가을 이던가, 초겨울 이던가?...
작은 아버지가 늦장가를 가시던 어느날 커다란 눈송이가 띄엄 띄엄 오락가락하며 흩날리는데 저만큼 진동밑 과수원을
지나 질골(부상리)로 가는 신작로에 앞뒤에서 두사람이 멘 새색시가 탄 가마가 달랑달랑 오고있고 동네 다 큰 누나들과
짖궂은 아줌마들이 우루루 가마를 따라가며 앞 문을 들추면서 "야! 새색시가 참 이쁘다!"하며 놀림인지 칭찬인지
알수없는 소리로 낄낄 거리고 수근대며 따라갔다.
지금도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지만 넓직한 우리집을 지나쳐서 100 여 미터는 떨어진 집(테마네 집)을 빌려 새 신부의
임시 대기실로 썼다.
미루어 짐작컨데 집안에 수년간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이 액운만 겹치니 모처럼의 경사스런 날이라 할머니가 미리
액운을 쫒아내려는 예방차원에서 무당에게 알아보시고 어떤 주술적인 이유에서 그리했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친척중에 대구에 사시던 6촌 형님이 그 당시 가보나 다름없는 귀한 카메라를 가져오셔서 아주 사소한 장면까지
모두 사진으로 남겨주셨고 온 집안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한 잔치가 벌어졌다.
그날 저녁엔 신부댁이 대전인데다 살기가 어렵다고 신부집에서의 잔치는 간략하게하고 우리집에서 제대로 잔치를 하기로
했다며 친척들과 동네 청년들이 늦장가 가는 늙은(?) 새신랑을 다룬다고 작은아버지를 꽁꽁묶고 북어와 목침으로
발바닥을 두드리며 새신부에게도 억지로 술을 먹이고 신랑을 업어주라는등.... 온갖 장난을 다했다.
그 당시 꼬맹이인 내눈엔 그 모습들이 어찌나 겁이 났던지 속으로 내가 커서 어른이 되어 장가를 가 저렇게 얻어맞으면
어쩌나하고 걱정했고 저렇게 무서운 장가는 절대로 가지않겠다고 다짐을 했었지. ㅎㅎㅎ....
그 당시엔 아무리 못살고 형편이 어려웠어도 인심은 한없이 후해서 동네 어떤 집이라도 애경사만 있으면 온 식구가
모두 와서 온종일, 밤중까지라도 일을 거들어 주며 술과 떡은 물론 하루 끼니를 다 해결하는 후한 인심이었다.
나도 맛있는 떡과 음식 덕분에 서먹서먹하고 낯설던 친구들과 친해지는데 단단히 한몫을 했고...
그렇게 늦장가를 가신 작은 아버지는 그동안 고생만 시킨 가족들에게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일반 농사일도
열심히 하셨고 또한 몫돈이 된다는 담배농사를 지으시겠다며 한동네 사시는 큰 고모댁과 작은 고모댁의 도움을 받아
이른 봄부터 초창기에 농촌 지도소에서 권장하던 퇴비가 썩을때 나오는 열을 이용한 온상을 양지바른 앞마당 일부에다
만들어 담배모를 기르셨으며 울역(집을짓거나 할때 무임금으로 이웃에 도움을 주는 일)으로 동네사람들과 고모부네
도움을 받아 담배를 건조시킬때 불을 때서 건조시키는 건조실을 재래식 화장실 옆에 흙벽돌로 높다랗게 지으셨다.
그 해에는 담배농사며 보리 특히 고추농사가 아주 잘되어서 마당은 물론 지붕이나 마루 건너방, 안방 할 것없이 온통
빠알간 고추로 온 집안에 넘쳐났다.
그중에 한 꼬투리에 고추 두개가 쌍으로 달린 희귀한 고추가 있어 몇개 골라 큰 거울 위 못에 걸어두고봤던 생각이 난다.
더우기 틈틈이 작은 아버지께서는 산에 가시어 땔감을 산더미처럼 한짐씩 해서 부엌앞 마당에 "쿵 " 하고 메어치시면
할머니는 물론이고 우리어머니도 한없이 흐뭇해하시며 무척 좋아하셨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통에 남정네는 모두 죽거나 막내 삼촌까지 군에 입대를 하신후론 수년간을 주로 어머니가
그 힘든 농사일을 틈틈이 땔감을 구하러 온 산을 헤매시며 까치집만하게 나무단을 만들어 머리에 이어 나르면서 힘들게
땔감을 해결하셨으니 작은아버지의 집채만한 나뭇짐이 결코 만석군이 부럽지 않으셨으리라. (다음에...)
가을소리
(슬픈 지난날들)이 1편이끝이아니고 2부가 있었군요 그 오래전 우리네 삶이라는게 희(喜)보다 怒가 많았던
時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배인우리가 보기엔 슬픈 추억이라기 보다 동네 축제인 구식결혼식하던 그때가 먼저 떠오릅니다 ~~
부억에선 음식만드느라 연신불때고 아랫목에 앉아 출입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던신부가 땀만 뻘뻘흘리며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오르고요.
결혼식이 시작되면 한복에 쪽도리 쓴 신랑, 연지곤지찍고 쑥스러워하던 신부 모습이 떠오릅니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음식상을 사이에 두고 맞절하면 아들낳으라고 대추 던지던 동네사람들의 순박했던 일이 잊을수 없군요.
글구, 우리같이 철부지 넘들은 이게 얼마만이냐하며 맛있는 음식 실컷 먹었고....
소화가 될만하면 또가서 얻어먹던 일도 생각납니다~
신랑친구들은 장난기가 발동해 거꾸러 매달고 발바닥을 냅다 때리면 엄살인지 쑈인지 죽을상 해보이며 봐달라는
시늉하던 것도 생각나구요. (그게나중에 알고보니 건강은 발에 있었답니다. 발을 잘자극해줘야 거시기가 제대로 작동한다나요.....ㅎㅎㅎ...
첫날밤에 위축되지말고 일 잘보라는 대대로내려오는 선인들의 깊은 뜻이 있었던것이지요. ㅋㅋㅋ.... ^^ )
아뭏튼 요사이 결혼식은 갈비탕 한 그릇먹고 시간없다며 줄행랑 치는것이 요식행위에 인간미가 없는것 같아 씁쓸합니다.
또, 예전엔 농한기라도 눈이 안오고 날이 푹한 날은 장성한 청년들은 지게지고 나무하러 산에 올라 나무 한짐씩 해오던 것도
생각납니다.
늦장가 가신 삼촌께서 열심히 사시고 친척간에도 보이지않는 열기가 있는듯 하여 슬픈 지난 날들이란 제목이 어울리지
않는 듯 해보입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孤雲 선배님 추억의 글에 피로함을 잠시 잊고 흑백영화 시절로 돌아가 봤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