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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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기습남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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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고요한 새벽에 휴전선은 탱크소리와 총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북한이 기습남침을 한 것이지요.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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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남침기습을 알리는 뉴스는 전 세계에 발로 알려졌습니다. 전세계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5년도 안되 전쟁이 일어나자 경악하였습니다. |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 결의 장면(1950. 6. 28) |
| 다. |
1950년 6월 28일 해질 무렵, 서울 외각에 위치한 우리의 미아리 방어선에 북한군이 T-34 전차 10대를 앞세우고 쳐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격퇴했지만 다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는 패배해서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북한군은 이젠 서울로 걸어들어갈 일만 남은 셈이지요. 이때가 28일 새벽 1시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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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예상 밖으로 한국군이 춘천과 홍천 등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잘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군대의 최초의 승리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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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30일, 북한군은 3일간의 정적을 깨고 다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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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7일, 영국과 프랑스는 공동으로 UN 군 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이것이 가결되어 UN 은 최초의 군사 지휘기구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 UN 기를 수여받는 맥아더 장군 (1950. 7. 7) |
이에 따라, 미국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4일 그는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도 넘겨받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미군, 한국군, UN군의 총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총 16개국이 한국에 대해 전투 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혹은 시설 지원을 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통보하였고 이에 따라 유엔군은 한국에 지상군 1개 군, 2개 군단, 9개 사단, 3개 여단, 8개 보병대대와 그 지원 부대들을 지원하였으며 총 병력은 34만 10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해군은 2개 기동함대, 공군은 3개군의 전력이 동원되었습니다. |
미군이 지상군을 투입하고, UN 군도 지원을 시작했지만 전세는 불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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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전선과 대전이 점령당한 후 병력이 거의 없었던 전라도 지방도 쉽게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대구에 있던 수도도 부산으로 급히 이전하였으며 이젠 대한 민국은 한반도의 끝에 위치한 부산을 중심으로 아주 작은 땅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사투를 벌여야했습니다. | 낙동강 유역의 피난민들이 안전한 미군지역 |
모두들 낙동강을 지키는데 전념하고 있을 무렵, 맥아더 장군은 크로마이트 작전을 완성하는데 노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크로마이트 작전은 북한의 허를 찌르고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키기 위한 과감한 작전으로 한반도의 중간부분에 위치한 인천에 기습 상륙하는 것이었습니다. |
드디어, 9월 15일! 엄청난 선단이 인천 앞바다에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지상군 75000명, 함선 261척의 대규모 상륙부대는 제주도 아래에서 서해를 북상해 왔습니다. 이에 앞서 미국 첩보부대가 인천에 먼저 들어와 인천의 상황을 사령부에 보내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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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연합군은 38도선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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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맥아더 장군은 북한에게 항복할 것을 최후 통첩하였으나, 이미 중공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공은 UN 군이 북쪽으로 넘어올 경우 한국 전쟁에 개입한다고 UN 군에 경고했습니다. |
11월 1일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은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어 2일에는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하였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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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모인 UN 군과 한국군 부대들은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서 흥남 주위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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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현봉학은 고민끝에 하니대령과 함께 LST등 여러 군용 함선에 여유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알몬드 사령관에게 부탁했습니다. |
흥남철수 작전이 성공할 무렵, 서부전선은 중공군에게 38선까지 밀렸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제 8군 사령관 워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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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다시 유리해짐에따라 미국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그리고 합동 참모 본부는 전쟁을 확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이 중간에 다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